창세기(완료)

창44:14-25(23.07.06.목)

은혜바라기 2023. 7. 6. 08:28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 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 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오늘 말씀이 조금 길죠? 하지만 말씀의 내용은 매우 간단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이 누구를 상징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형제들의 아버지 야곱은 성부 하나님의 역할로 나오고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 그리고 베냐민은 성령님 그리고 나머지 형제들은 교회의 역할입니다. 

 이 에피소드에 흐르는 대주제는 형제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요셉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선택받은 백성, 즉 교회는 오직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되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죠. 짧게 말하면, 교회는 성령 충만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가서 찬양과 기도를 뜨겁게 하면 가슴에 뜨거운 것이 ‘훅~~’ 하고 올라오면서 일종의 황홀경(?)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체로 행동을 할 때 더 큰 각성 효과를 발휘하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성령충만’ 받았다라고 느낍니다. 맞을까요? 택도 없는 말입니다. 

 이런 황홀경은 모든 종교에 다 존재합니다. 심지어 10대들의 콘서트에 가면 매우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단체로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하는 장면은 모두 집단 각성, 집단 체면 효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험은 모두 가짜란 말인가? 사실 ‘가짜’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신 ‘일반은총’ 일뿐입니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이나 살인을 한 사람이나 모두 물과 공기 그리고 태양빛의 유익을 똑같이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충만’의 참 의미는 ‘모든 것을 복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반대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을 인본주의로 해석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선택받은 자들은 그들의 인생 중에 성령께서 찾아 오셔서 그 자의 영적 눈을 뜨게 하시죠. 이것을 ‘거듭난다’ 혹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혹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령께서 그를 견인하시고 조명하셔서 계속 복음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 말씀으로 가지고 ‘술 먹지 말고 교회 와서 찬양하고 기도해라’라고 설교를 하지만 이 구절은 그런 유치한 교훈을 전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술 취하는지 말라’는 것은 인본주의에 묶여서 그것에 중독되어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술은 먹으면 또 먹고 싶고 결국 취해 술이 나를 먹게 되는 속성이 있는데 그 속성이 인본주의에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잡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그것이 나를 삼켜버려서 인본주의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속성과 너무나 닮아 있죠. 그래서 인본주의를 경계시키기 위해 잠시 '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서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어떤 노력해야 하는가?’ 의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의 속성상 이런 노력은 불가능합니다. 찬양을 10시간 부르고 새벽예배를 하루도 안 빠지면 성령을 가슴에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복음의 속성상 모순이 되죠. 성경은 그렇게 인간의 노력을 쌓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라면 이렇게 온 인생을 성령께서 복음의 방향으로 몰고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 이해력이 부족한 유한한 인간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놓으신 것뿐입니다. 반복합니다. 성령충만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100% 하시는 것이고 그 대상이 ‘선택된 자’라면 인생 속에서 틀림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죄인과 새리, 창녀들과 식사 때 마다 포도주를 드셨죠. 심지어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고 제사를 드리라는 장면도 나옵니다. '독주'라는 단어 때문에 알코올 도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죠. 이렇게 성경을 계속 ‘행위’에 맞추어서 해석하면 결국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은 전적타락한 존재입니다. ‘전적타락’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검은 종이로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정육면체를 만들고 그 안을 검은 잉크로 꽉 채운 후 그 안에서 죽은 채로 태어난 눈먼 장님이 바로 ‘전적타락 나’의 그림입니다. 그 안에서 말씀으로 빛 되신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절대 알아들을 수가 없죠. 전적타락한 존재인 ‘인간’이 빛 되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짐작이 가시죠? 이것은 내가 술 좀 덜 먹고 교회 가서 기도나 찬양을 조금 더 열심히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성령께서 그 검은 종이를 찢고 들어와 나의 마음을 강제로 열고 나의 마음에 생명을 심어 죽었던 나를 살아나게 하신 후 나의 눈과 귀를 열어서 예수님을 보여주셔야 알아듣게 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선택받은 자를 찾아오실 때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바로 ‘나의 상태(전적타락)’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본질은 완전히 비참하죠. 나의 마음은 모든 가치를 상실한 가난한 자가 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애통하고 슬퍼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택된 자들은 결국 성령님의 위로로 이 구조에서 빠져나와 그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죠. 이것을 성령께서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교회’는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성령충만한 교회를 상상해 보세요. 어디까지가 교회고 어디부터가 성령인가?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성부 하나님의 역할로 나온 야곱이 베냐민(성령의 역할)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쏟는 장면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장면으로 설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형제들이 다시 요셉을 만나게 된 계기는 요셉이 꾸민 거짓 도둑질(죄) 때문이죠. 즉,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밝혀져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가 예수님이 꾸민 것이라는 부분은 매우 깊은 묵상이 팔요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제 매우 자세히 묵상했으므로 생략합니다.(어제 묵상을 못하신 분은 어제 묵상분을 꼭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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