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니 더 집중해서 들어주세요.
‘예수님을 밴 태와 예수님을 먹인 젖이 복이 있다’는 구절은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틀림없이 복이 있다는 의미죠. 예수님은 그리스도(구원자)입니다. 그런데 어떤 한 여자가 그런 분을 낳고 기른 마리아는 틀림없이 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얼핏 들으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말에 반대를 하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여기서는 말씀 속의 본질인 복음을 가리킵니다.)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장면을 성경에 삽입하셨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또는 예수님이라는 신을 믿고 따라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그 분의 정체성은 복음의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 즉 복음을 정확히 알아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교회의 십자가를 보면 예수님께서 달려 있죠. 그 형상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는 자는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그냥 절에 가서 부처님의 형상을 보고 ‘부처님을 믿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와 정확히 똑같은 것입니다. 그냥 부처님의 형상의 자리에 예수님의 형상을 넣고 비는 것뿐이죠. 이 모든 것은 그냥 '종교활동'일뿐입니다.
교회의 십자가는 그 의미가 ‘죄인을 심판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달린 형상은 바로 ‘나’입니다. 육체적으로 고통받아 죽는 것과 영적으로 영원히 고통받고 영적 죽음을 당하는 자리죠. 심판이자 지옥을 상징하는 저주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내가 저 자리에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 인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나 대신에 예수님께서 가셨죠. 이 두 장면은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이런 저주와 고통을 배경으로 합니다. 복음은 항상 고난을 배경으로 합니다. 복음은 항상 광야같은 인생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능력한 죄인이자 괴수인지를 알아가는 것이죠. 이렇게 나의 비참함을 알게 되는 것이 복음의 1순위이자 전부입니다. 그것을 알게 될 때 그 자리를 대신한 예수님의 참 정체성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정의는 '비참함'입니다. 이것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가 태어난 이유입니다. 선악과 에피소드를 기점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스스로 살아 보겠다는 인간의 결심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인생 80년을 통해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결과(노년)가 약해지고, 병들고, 외롭고, 늙고, 추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의 결과를 설계하신 자체가 하나님의 커다란 메시지죠. 심지어 인간은 결국 죽죠. 즉, 인간은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분리된 순간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인간이 결론적으로는 죽은 자로 끝을 맺는 현상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모든 책의 저자가 결론에서 자신의 중심 의도를 드러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결론을 늙고, 추하고, 심지어 죽어 흙이 되는 것으로 설계하셔서 그분의 의도를 정확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은 이 인간의 비참함을 아는 만큼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어 복음의 말씀이 내 안에서 확장됩니다. 오직 소망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이 점점 확장되죠.
예수님의 정체성은 복음의 주인공이고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알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왜 필요한가를 알게 하시고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즉, 성경 그 자체가 전부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이 '말씀(그 말씀 안의 본질인 복음)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지키다'는 Doing(행위) 이 아니라 Keeping(말씀 안에 머물다)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그냥 자기들의 바람, 교회의 부흥,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이라는 신을 믿자~~’라는 종교의 자리에 머물죠. 이때의 교회는 그냥 예수님이라는 신을 만들어서 그것을 길러내는 모체의 역할일 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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