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완료)

눅11:29-32(23.12.26.화)

은혜바라기 2023. 12. 26. 07:56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그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은 모두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악하다’고 하시죠. 그래서 선택받은 자들이 마지막으로 벗어나야 할 것이 바로 ‘종교(기독교)’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서 옛 자아로 살면서 육체가 죽을 때까지는 절대 ‘종교생활’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고로 제가 드리는 말씀은 교회를 관둬라~~ 는 말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종교생활을 하면서 결국 종교생활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제사를 허락하신 이유는 그 제사의 무가치함을 깨달아 완전한 제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산 제사를 소망해야 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종교생활을 하다가 복음을 깨닫게 되면 종교생활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다시 행위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인본주의 사고방식입니다.  종교를 벗어나야 한다는 말은 그 종교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 종교를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죠. 하지만 이것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행위 명령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선택받은 자들에게 나타난 현상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선택받은 자들은 종교생활을 하면서 결국 그 종교의 모순성을 계속 느끼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종교의 모순성이 예수님만 소망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종교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탕자는 반듯이 방탕한 생활을 통해 다시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는 것과 같은 방향성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 율법을 어기시고 죄인들과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하셨죠. 그 당시 상황으로는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그 모든 것은 복음을 설명하는 장면이죠. 

 오늘 본문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종교적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고 있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죠. 그렇다면 요나의 표적이 뭘까요? 바로 ‘복음’입니다. 

 요나의 표적에 대하여 조금 상세히 설명드리면, 니느웨는 그 당시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이단적이고 가장 그들을 괴롭힌 적국의 수도였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합니다. 요나는 싫다고 도망가죠.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결국 니느웨로 떠밀려 갑니다. 그러나 그는 니느웨에서 성실하게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요나3장3절을 보면 니느웨는 3일을 걸을 만큼의 큰 성이라고 했는데 그다음 4절을 보면, 요나는 하루 동안만 다니며 매우 성의 없이 ‘니느웨가 무너질 거야~~’만 외쳤죠. 그게 다입니다. 

 즉, 니느웨에서 요나가 보인 표적은 ‘심판’이 전부였습니다. 심판은 복음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죠. 심판은 '분리'입니다. 유기된 자들에게는 심판이 멸망이 되지만 선택받은 자들에게 심판은 '복음'이 되죠. 이때 니느웨 사람은 이 심판을 복음으로 읽고 모두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회개했죠. 심지어 가축도 회개를 합니다. 가축에게 까지 베옷을 입혔죠. 이 요나의 에피소드와 똑같은 결론으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이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은 전부 멸망당할 것(정죄당할 것)이라고 31-32에 말씀하시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복음’만을 보일 것이라는 말씀하셨는데 사실 예수님은 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이셨죠. 그러나 이 이적과 표적은 모두 복음을 설명하는 빨간 색연필일 뿐입니다. 

 남방 여왕은 이단의 괴수입니다. 그런 자 조차 솔로몬의 지혜(복음을 가리킵니다.)를 듣고자 했는데 너희들은 예수님께 복음을 직접 듣고도 종교적 표적만 구하는 악한 자라고 책망하는 내용도 나오죠. 이것도 요나와 같은 형식의 책망입니다. 오늘 말씀의 요지는, 기독교라는 도구를 통해 종교생활이라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는가? 아니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는가? 에 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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