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완료)

눅12:39-40(24.01.26.금)

은혜바라기 2024. 1. 26. 08:35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어렵지 않죠? 그런데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죠?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40절에서 인자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했기 때문에 그 인자 예수님을 비유한 39절의 단어는 언제 올지 모르는 '도둑'입니다. 그렇다면 그 도둑을 방비하고 막아야 하는 집 주인은 나의 옛 자아가 되겠죠. 그리고 나의 옛 자아는 사탄의 영역에 있는 존재죠. 그래서 해석을 하면, 사탄과 그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옛 자아가 복음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침투하여 들어올지를 미리 알고 있다면 절대 그 복음이 들어올 수 없게 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에게 복음은 100% 전달이 되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잃어버린 양들을 전부 다 찾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탄도 모르고, 나의 옛 자아도 모르는 시간과 방법으로 침투하여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가 해석은 어렵지는 않은데 부자연스러운 이유는 우리의 선, 악의 개념 때문입니다. 자기의 집을 잘 지키는 것을 선으로 알고 있고 자기의 집을 침투하는 도둑을 악으로 알고 있는 우리는 사탄과 예수 그리스도를 집주인과 도둑으로 인식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자 예수님을 도둑에 비유하면서 복음을 설명하신 이유는  이 에피소드가 주는 본질적인 복음의 설명 외에도 인간의 선과 악을 뒤 바꿔서 설명하므로써 우리의 선,악 개념에 대한 깊은 묵상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외로 인간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개념을 뒤바꿔서 복음을 설명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인본주의 선과 악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전부 ‘악’입니다. 인본주의 자체가 ‘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우리는 그 인본주의 밖에서 이것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인본주의 내에서 선과 악의 개념이 진리인 것 처럼 배우죠.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검은 색과 흰색을 가르쳐야 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검은 상자 안에 검은 잉크로 가득찬 곳에서 눈이 먼 상태로 태어난 자에게 흰색을 가르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에게 눈을 한번 찌를 때 마다 조금 더 검은 색이 진해지는데 이것을 ‘악’이라고 하고 눈을 한번 쓰다듬어 줄 때 마다 검은 색이 조금 약해지는데 이것을 ‘선’이라고 한단다~~ 라고 가르치는 것이 이 세상의 선과 악의 개념입니다. 

 구약의 10계명, 더 나아가서는 구약의 613가지 율법들을 보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인본주의 세상에서 이것이 선이다~~ 라고 하면서 자신들끼리 '선한 행위' 로 규정하고 이런 행위를 많이 할 수록 더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점점 더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의 본질은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는 방향성에 올라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계신 곳 까지 바벨탑을 쌓아 닿게 하자~~ 라는 방향성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때 사탄이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 고 유혹한 것과 동일하죠. 즉, 인간이 예수님 없이 선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교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일명 '선한 행위' 중에서 복음을 설명하기 좋은 613가지를 추려서 ‘허락’ 하시죠. 그런데 그 이유가 인간은 절대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셔서 인간을 심판아래 가두려는 것입니다. 또한 그 613가지 율법의 내면은 모두 복음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 율법을 깊이 묵상하면 예수님만 소망하게 됩니다. 정말 대단한 감동이죠? 심지어 613가지 율법을 10가지 십계명으로 잠시 묶으신 이유도 10이라는 완전수가 필요하신 것 뿐입니다. 율법, 즉 말씀은 완전하다. 혹은  온전하다. 혹은 완성되었다 라는 것을 10으로 표현하신 것이죠. 

 ‘살인하지 말라’라는 제 6계명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냥 인본주의 세상에서 자기들이 ‘선’이라고 정해놓고 살인하지 않으면 ‘선한 사람 되는 것’으로 착각하며 지켜오던 가장 상위법이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러면 내가 그것을 법으로 줄테니 완벽하게 지켜바~~ 라고 허락하신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절대 지키지 못하죠. 전쟁, 살인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자로 오시니 그 분을 죽이죠. 절대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라는 종교인들은 ‘나는 한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 나는 선한 사람이야~~’라고 선언을 하자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도 살인이란다~~’라고 하시면서 율법의 본질적 기준을 다시 설명하시죠. 

 이때 바리새인이 그렇구나~~ 나는 죄인이구나~~로 유턴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참고로 살인자가 살인을 뉘우치고 이제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겠구나~~ 라고 각오하는 것을 '반성'이라고 합니다. 반성과 회개는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말하는 예수님을 죽이는 살인자의 길을 선택하죠.  즉, 말씀이 나를 심판에 가두니 그 말씀을 죽이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즉,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을 살인하는 아이러니 속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바로 우리가 매일 겪는 상황입니다. 

 결론은, 인본주의 악도 악이고 선도 그 본질은 악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신 이유는 인본주의 선과 악 모두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39절에서 사탄을 도둑을 지키는 집주인으로, 예수님을 도둑으로 비유해도 그것이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면 그 말씀은 모두 진리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또 이상한 점은, 복음은 언제 침투할지 모른다는 것이 39절인데, 40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라고 하죠. 언제 침투할지 모르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늘’ ‘항상’입니다. 이것이 ‘항상 기도하라’는 구절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 준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나를 이렇게 수시로 준비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설명드리면, 선택받은 자들은 인생을 늘 복음으로 생각하고 묵상하는 증상이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마다 묵상하세요. 핸드폰에서는 첫 화면 중간에 보시면 “분류 전체 보기”를 보시면 됩니다. )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이 말씀의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니라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날을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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