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시 역사에서 발생한 작은 2가지 사건을 인용하여 가르침을 주시고 있죠. 그런데 성경은 이 2가지 역사적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사건의 인과율에 묶여 복음을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을 방지한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복음만을 설명하기 때문에 이런 사건들을 인용할 때에도 복음 설명에 필요한 만큼만 잘라서 사용하십니다.
이 2가지 사건에서 인용된 요점은, 인위적으로나(1절) 자연적으로나(4절) 사람들이 사고를 당해 해를 받거나 죽는다고 해도 그 사람들의 죄가 다른 사람들보다 큰지않다는 것입니다. 더 넓은 범위로 해석을 하면, 인간에게 나타나는 모든 인생의 결과물은 그 사람의 죄로 인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교통사고, 암에 걸림, 사기 피해, 폭력적인 남편, 직장에서의 퇴출 등등 이런 모든 상황은 그 사람의 죄의 경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죄'는 이런 불행한 인생의 결과물과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서 똑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똑같이 보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전적타락’한 죄인일 뿐입니다. 죄란 살인, 강도, 거짓말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것들은 죄의 증상이죠. 그 증상을 가지고 인간의 기준으로 해가 되는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이 인본주의에서 정한 죄와 선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죄와 선을 정하고 있는 인본주의 그 자체가 '죄'의 본질입니다.
참 죄의 정의는 ‘하나님과의 분리’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선악과 사건이 바로 이것을 에피소드로 설명한 것이죠. 사실 선악과를 먹어서 인간은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선악과를 따 먹기전에 인간은 죄인이 되었죠. 이미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영적 죄를 짓고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 과정을 선악과 에피소드로 자세히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인(죽은 자)이 될 줄 아셨을 텐데 이런 인간을 왜 창조하셨을까요? 그것은 더 완전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묵시적 창조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시간을 창조하셔서 시간적 순서로 창조의 메카니즘을 설명하려니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참 창조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그들을 예수님의 신부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매일하는 사람이 뉘우치고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는 이런 사람을 ‘회개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것을 복음의 눈으로 보면 ‘회개’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반성’이죠.
‘회개’는 우리가 그 어떤 선한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어 나에게 어떠한 소망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회개와 반성의 가장 큰 차이점은, '회개'는 나에게서 어떠한 소망도 찾을 수가 없어 예수님께 완전히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고 '반성'은 과거의 나를 뉘우치고 내가 미래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전혀 다르죠? 회개는 기준을 나에게서 예수님께 옮기는 것이고 반성은 기준을 과거의 나에게서 미래의 나로 옮기는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