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반복 서론 : 일곱 교회는 일곱 개의 각기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7이라는 숫자는 복음에서 ‘완전함’을 의미하므로 ‘완전하게 구원받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즉, 일곱 교회는 ‘구원받은 나’입니다. 고로 각각의 교회마다 칭찬과 책망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 있는 동안 겪게 되는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열심이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이 방향성을 잃지 마시고 묵상하세요. ))
‘볼지어다’는 눈으로 복음을 본다는 이야기죠. 성경은 유난히 ‘눈’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기적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온 기적이 ‘눈을 뜨게 하는 기적’입니다. 총 7번 나오죠. 왜 이렇게 눈을 뜨게 하는 기적, 비유, 말씀이 많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장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보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는 자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눈을 뜨지 못한 자들에게 빨간 장미를 찾아 보세요~~ 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우왕좌왕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중 몇 몇이 자신들만의 그럴듯한 논리로 ‘빨간 장미 찾는 법’ 이라는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가시가 많은 것이 빨간 장미 혹은 나뭇잎이 많은 것이 빨간 장미라는 등의 논리를 내어 놓죠. 그러면 그것을 ‘믿음’의 형태로 쫓는 자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그것을 쫓는 사람이 많아지면 나머지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믿으니까 맞겠지~~’라는 또다른 논리가 생겨납니다. 이것이 인본주의 종교의 실체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갈 때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이것이 하나님이다~~ 라고 아론이 말하자 모든 자들이 따르던 에피소드가 기억나세요? 이 에피소드는 그런 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것 같은 교회가 따로 있어서 ‘그런 교회를 가지말자~~’ ‘우리는 저런 식으로 믿지 말자~~’라는 교훈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기독교 포함)는 전부 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 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볼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명령문이죠. 예수님의 명령은 그것이 선언되는 순간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에 종속될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그 명령이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맞게 의미적 순서대로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로 ‘볼지어다’이지만 ‘보게 될 것이다. 나의 신부들아~~’로 읽으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요?
그 답은 20절에 나와 있는데 이 20절이 가장 오해가 많은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두드릴 때 내가 문을 열어야 구원을 받는다~~ 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잡을지 말지에 관한 선택은 나에게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완벽한 이단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은혜는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시려고 할 때 선택받은 사람은 절대 거절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두드리는 과정으로 설명하셨을까요? 이상하죠?
그래서 ‘볼지어다’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즉, 선택받은 자들은 이 장면을 반드시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장면일까요?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두드리면 내가 그 음성을 반드시 듣게 되어 문을 열어 예수님을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행위’에 초점이 있는 사람과 ‘복음’에 초점이 있는 사람이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는지 아시겠죠?
‘나의 행위, 나의 신앙 행위’에 촛점이 있는 자들이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문을 여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장면을 반드시 보게 하실 것이야~~’라는 예수님의 선언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이 구절에 나오는 장면을 반드시 보게 된다는 믿음으로 받게 됩니다. 이후 ‘예수님과 더불어 먹는 장면’은 천국의 삶을 의미합니다. 21절은 천국의 삶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해 주셨죠. ‘예수님의 보좌에 그 분과 함께 앉아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반드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귀 있는 자’만 성령을 통해 듣게 된다고 마무리 합니다. 이 말씀은 눈을 뜬 자만 복음을 보게 된다는 것과 똑같은 패턴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기적 자체에 의미를 두고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모든 기적은 전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이런 기적을 사용하신 이유는 ‘형광펜’으로 복음을 더 잘 설명하려고 밑줄긋기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행위를 초점으로 하는 종교인들은 ‘나에게도 기적을 일으켜 주세요~~’라고 바라죠.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그렇게 강조하신 복음의 의미를 오늘 나에게도 속삭여 주세요~~’라고 소망합니다. 이것이 종교와 생명의 차이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지금 나에게 벌어지는 일, 미래에 나에게 벌어질 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나는 예수님의 품에 들어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후 그 분과 함께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 안에 내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 간다는 것은 나를 알아간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며 그 분을 알아가는 삶만을 꿈꾸게 되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