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완료)

요한계시록18:4-8(24.11.18.월)

은혜바라기 2024. 11. 18. 07:51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 당분간 서론에서 요한 계시록을 전체적으로 분류 & 요약 & 반복합니다. 한 번 읽으신 분은 [[ 이중괄호 ]]를 생략하고 묵상하시면 됩니다. 
 요한 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예언서가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께 선택받아 구원받은 자들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복음적 관점에서 묵시 문학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물론 역사와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어느 날 같은 방향성의 사건은 계속 일어나지만 그것은 초점이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은 무서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하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미리 그 내용을 이야기해줌으로써 복음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평강을 얻게 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곱 교회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숫자 7은 복음적 완전수이기 때문에 일곱 개의 교회라는 뜻이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예수님께 선택받은 모든 사람의 완전한 모임을 의미합니다. (묵시에서 완성된 참 교회를 의미하죠.)
 이후 7인, 7나팔, 7대접의 고난이 나오죠. 인은 ‘은닉속성’ 나팔은 ’알림속성‘ 대접은 ’준비속성‘을 의미합니다. 7은 복음적 완전수라고 했으니 복음이 은닉속성, 알림속성, 준비속성을 가지고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담겨 선택받은 자들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요한계시록1~16장입니다. 숲이 아닌 나무를 하나씩 하나씩 분류해서 설명하듯 고난을 통한 복음의 메시지를 숫자1234567로 나누고 각각의 숫자의 속성을 이용해 설명한 것이죠.
 이후 17장 부터는 나무가 아닌 숲은 보면서 전체적인 복음적 메시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17장은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를 붙잡고 있는 죄의 본질인 인본주의 정체에 관하여..
 18장은 그런 인본주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하여..
 19장은 그런 인본주의가 심판되면서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
 20장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 이 땅의 모든 역사를 천년 왕국으로 비유하면서..
 21장~22장은 결국 완성되는 예수님 나라의 모습으로 요한 계시록은 끝을 맺습니다. ]]


 직전 묵상 1-3절은 인본주의로 상징된 바벨론은 결국 무너지며 그런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왕과 상인들도 함께 무너진다는 내용이었죠. ‘왕과 상인’은 우리의 옛 자아의 가장 큰 두 가지 속성의 상징입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왕의 속성’과 인본주의 가치만을 위해 사는 ‘상인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하시죠. 늘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그 명령이 내려지는 순간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명령은 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됨(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것에 공짜로 참여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로 상징되는 소돔을 탈출하는 롯과 그의 가족에게 하나님께서는 절대 뒤를 돌파보지 말라고 하셨죠. 하지만 롯의 처는 뒤로 돌아봅니다. 그래서 죽었다~~ 가 결론이 아닙니다. 성경이 알려주려는 참 결론은 ‘소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롯의 처와 한 몸이 되어 롯의 처를 소돔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분리시켰다~~’입니다. 이것은 롯의 처 대신 예수님께서 소금기둥, 즉 십자가 기둥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5절, 인본주의와 나의 옛 자아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고 그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6절을 보면 그의 행위대로 모든 것을 갚아 주신다고 하죠. 7절은 심지어 고통과 애통함으로 그 죄를 갚아 주신다고 합니다. 이런 심판은 유기된 자들에게 내려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판의 본질적 대상은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입니다. 

 말 그대로 ‘유기된 자’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단 1도 관심이 없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초리로 때리거나 협박해서 돌아오게(회개)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반성은 할지언정 절대 회개는 할 수 없습니다. 반성은 내가 앞으로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것을 기초로 하고 회개는 나는 앞으로도 계속 죄를 저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반성은 더 나은 나를 의지하는 방향성이고 회개는 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이죠. 
 
 이렇게 회개를 할 수 있는 선택받은 백성은 태초에 정해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 유기된 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선택받은 자들이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옛 자아 상태를 인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유기된 자들은 거울에 비친 나의 옛 자아입니다. 매우 냉정한 말이지만 유기된 자들은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유기된 자들을 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으시죠. 

 고로 5절-9절에 나오는 유기된 자들의 고통받는 모습은 사실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가 받는 고난이 초점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그 고난을 통해 다시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7절 하반절처럼 나의 옛 자아와 유기된 자들은 끝까지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 유기된 자들과 나의 옛 자아는 이 땅에서 오직 나만을 위해 사는 여왕같은 존재이므로 애통하지 않는다고 결심합니다. 

 성경에서 ‘과부’란 남편이 없는 여자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이 땅에 내동댕치 쳐진 상태를 ‘과부의 상태’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과부된 나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너는 나의 신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러나 나의 옛 자아와 유기된 자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인본주의라는 남편을 섬기기 때문에 나는 과부가 아니다~~ 그러니 애통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라도 이 땅에서 옛 자아로 사는 동안은 늘 예수님이라는 신랑을 잊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에피소드’를 기억하세요? 

 남편이 5번 바뀌고 6번째 남편이랑 사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정한 생수(생명,구원)라고 하십니다. 숫자 6은 인본주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인본주의(6)에 묶여 있는 선택받은 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참 생명되시며 우리의 참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8절을 보면, 이런 모든 재앙들은 ‘하루 동안’에 이른다고 나옵니다. 이것도 ‘하루’라는 단어의 ‘긴박성’과 ‘단일성’의 속성을 사용한 것입니다. 긴박성은 구원은 하나님의 시간으로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일성의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단번에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