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완료)

요한계시록18:9-10(24.11.19.화)

은혜바라기 2024. 11. 19. 08:33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 당분간 서론에서 요한 계시록을 전체적으로 분류 & 요약 & 반복합니다. 한 번 읽으신 분은 [[ 이중괄호 ]]를 생략하고 묵상하시면 됩니다. 
 요한 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예언서가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께 선택받아 구원받은 자들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복음적 관점에서 묵시 문학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물론 역사와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어느 날 같은 방향성의 사건은 계속 일어나지만 그것은 초점이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은 무서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하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미리 그 내용을 이야기해줌으로써 복음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평강을 얻게 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곱 교회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숫자 7은 복음적 완전수이기 때문에 일곱 개의 교회라는 뜻이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예수님께 선택받은 모든 사람의 완전한 모임을 의미합니다. (묵시에서 완성된 참 교회를 의미하죠.)
 이후 7인, 7나팔, 7대접의 고난이 나오죠. 인은 ‘은닉속성’ 나팔은 ’알림속성‘ 대접은 ’준비속성‘을 의미합니다. 7은 복음적 완전수라고 했으니 복음이 은닉속성, 알림속성, 준비속성을 가지고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담겨 선택받은 자들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요한계시록1~16장입니다. 숲이 아닌 나무를 하나씩 하나씩 분류해서 설명하듯 고난을 통한 복음의 메시지를 숫자1234567로 나누고 각각의 숫자의 속성을 이용해 설명한 것이죠.
 이후 17장 부터는 나무가 아닌 숲은 보면서 전체적인 복음적 메시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17장은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를 붙잡고 있는 죄의 본질인 인본주의 정체에 관하여..
 18장은 그런 인본주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하여..
 19장은 그런 인본주의가 심판되면서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
 20장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 이 땅의 모든 역사를 천년 왕국으로 비유하면서..
 21장~22장은 결국 완성되는 예수님 나라의 모습으로 요한 계시록은 끝을 맺습니다. ]]


 9절 시작하면서 나온 ‘그’는 2절에 나온 큰 성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큰 성 바벨론의 실체는 ‘인본주의’입니다. 바벨은 ‘혼잡’이라는 의미인데 바벨론과 바벨탑이 유명하죠. 이 두 가지는 똑같이 인본주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끝난 후 태어난 노아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조상들로부터 노아의 홍수 심판을 전해 들었겠죠.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은 바벨탑이었습니다. 즉, 우리가 모여서 힘을 합쳐서 물에 잠기지 않을 만큼 하늘에 닿을 탑을 만들자~~ 그리하여 우리가 흩어지지 말자꾸나~~ 라는 각오를 하죠. 이것이 하나님을 버리고 오직 인간의 생각과 기준으로 살기를 결정한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기준으로 사는 것, 인간 본위로 사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모여서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고, 나라를 이루고, 나라와 나라를 합쳐서 제국을 이루는 것도 결국은 인본주의 확장일 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약의 대표적 제국이 ‘바벨론’이죠. 구약의 제국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면서 계속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도구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흩어 버리셨듯이 제국도 계속 흩어 망하게 하셨지만 인간은 또 다른 제국을 계속 만듭니다. 인간은 앗수르에서 바벨론, 바벨론에서 페르시아, 페르시아에서 헬라, 그리스, 로마로 이어진 인본주의 최고 상징인 제국을 계속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중세를 넘어서면서 이념적 제국으로 발전합니다. 인간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등의 이념적 바벨탑도 만들어 냈죠. 사실 인류 그 자체가 인본주의입니다. 그래서 인본주의는 죄의 본질입니다. 

 결국 모든 성경은 최초 아담이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 스스로 살겠다고 하나님과 분리된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의 예로 말하면, 부모를 버리고 집을 가출한 청소년의 이야기와도 같죠. 성경의 예로 말하면, 돌아온 탕자의 비유와도 같습니다. 

 

 탕자는 돼지의 먹이조차 못 먹을 정도의 고난이 오면서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죠. 즉, 고난을 통해 복음을 알게 됩니다. 특히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번이나 강조된 '스스로' 라는 단어입니다. '스스로'라는 단어 때문에 돌아온 탕자는 스스로 돌이켜, 스스로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었죠.  이 '스스로'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절대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할 분이 있어야 하죠. 고로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가는 시점 부터는 내가 아닌 나를 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할 때 '인자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한, 죄인을 대신한, 선택받은 자들의 대표로써의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9절, 인본주의와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에서 땅의 왕들이란 우리의 옛 자아를 의미합니다. 음행은 하나님을 버리고 인본주의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치는 인본주의의 가장 강한 속성인 자본주의(돈)에 묶여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옛 자아는 오직 나만을 위해 살고 나의 기준대로 살기 때문에 그 속성이 왕과 같죠. 인본주의도 인류를 기준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나의 옛 자아의 속성과 인본주의 속성은 같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의 왕인 나의 옛 자아가 인본주의가 불타는 것을 보고 울고 가슴을 친다고 나옵니다. 또한 그 고통을 무서워하고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외치죠. 선택받은 자들에게 성령님께서 찾아오시면 그들은 복음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후 그들은 참 가치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그때부터 선택받은 자들은 인본주의 가치가 점점 상실되어 갑니다. 이때 나의 옛 자아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점점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자가 되죠.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런 자들이 복되고 천국을 소유한다고 하셨죠.

 10절 하반절, 결국 인본주의는 ‘한 시간’에 심판 받는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시간적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긴박성과 단일성’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긴박하게 우리를 인본주의에서 단번에 십자가로 끊어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7: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