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15절,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는 구절은 17장을 처음 시작한 1절에서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를 해석한 것이죠. 그런데 그 해석 조차 어렵습니다. '백성, 무리, 열국, 방언'은 모두 선택받은 자들과 그들이 함께하는 역사적 속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음녀는 호세아서에 나오는 음녀와 같은 의미입니다. 호세아의 헬라식 발음이 ‘예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음녀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령을 하죠. 이것은 예수님께서 음녀(죄인)인 우리(교회)를 구원하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간음의 본질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인본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질투’라는 감정을 주셨죠. 그래서 인간은 자신과 결혼한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한 몸이 되는 것을 알게 되면 엄청난 질투를 하게 됩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분노의 형태죠. 질투로 인하여 살인도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질투라는 감정조차 하나님을 떠나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인간의 행태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주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 음녀가 물에 앉아 있다고 하죠. 여기서 ‘물’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인본주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즉, 검은 색 종이와 흰색 종이를 비교하면서 선과 악을 가르치는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백성, 무리, 열국, 방언’은 일종의 ‘선택받은 자들의 역사’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 역사는 인본주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도도히 흐르는 형국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어렵나요?
호세아를 버리고 음행을 하던 음녀는 하나님을 버리고 인본주의 가치를 향해 떠난 우리를 의미하죠. 하지만 호세아는 그런 음녀를 다시 찾아서 한 몸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으셔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인본주의 역사 혹에 흐르는 은혜의 역사가 이해되시죠?
이후 16절에 나오는 열 뿔과 짐승은 사탄과 사탄의 힘인 인본주의를 의미하는데 결국 이 인본주의는 여자를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사른다고 나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인본주의 가치가 최고인줄 알고 그 가치를 위해 평생 노력하고 경쟁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쫓던 그 인본주의에 의해 스스로 붕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현상은 실제적이고 물리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우울증, 공허함, 허무함, 절망감, 고독감 등등 정신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오죠.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 역사 속에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쫓던 인본주의 가치가 붕괴되면서 진정한 가치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모두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국한하니다.
18절, 또한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이 구절도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우리의 옛 자아의 속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땅의 왕’은 인본주의 가치만을 위해 사는 속성입니다. 백성은 모두 왕을 위해 일을 하죠.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옛 자아를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내가 이 땅의 왕인 것입니다. 그런 나의 옛 자아를 다스리는 큰 성은 결국 나의 옛 자아가 묶여 있는 인본주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자를 인본주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의 옛 자아를 인본주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 혼자일 때에는 나의 기준대로 나를 위해서만 삽니다. 이것을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나는 부부, 가족, 공동체, 나라, 인류로 확장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확장된 나인 ‘인류’를 위해 사는 삶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의 옛 자아를 위해 사는 왕 같은 이기주의적 삶과 인류를 위해 사는 인본주의적 삶은 본질적으로 동류입니다. 이 둘 모두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던 삶을 버리고 사는 음행의 삶이죠.
보수정당이 맞는가? 진보정당이 맞는가? 따지는 것은 위집 남자와 바람 피는 것이 맞는가? 아랫집 남자와 바람 피는 것이 맞는가?를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민주주의가 맞는가? 사회주의가 맞는가? 공산주의가 맞는가? 자본주의가 맞는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에게도 왕을 달라~~’ 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나를 버린다~~’고 한 이유를 곰곰이 묵상해보세요.
우리는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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