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완료)

요한계시록18:11-20(21.11.20.수)

은혜바라기 2024. 11. 20. 08:23

땅의 상인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바벨론아 네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모든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외쳐 이르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 하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 당분간 서론에서 요한 계시록을 전체적으로 분류 & 요약 & 반복합니다. 한 번 읽으신 분은 [[ 이중괄호 ]]를 생략하고 묵상하시면 됩니다. 
 요한 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예언서가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께 선택받아 구원받은 자들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복음적 관점에서 묵시 문학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물론 역사와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어느 날 같은 방향성의 사건은 계속 일어나지만 그것은 초점이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은 무서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하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미리 그 내용을 이야기해줌으로써 복음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평강을 얻게 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곱 교회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숫자 7은 복음적 완전수이기 때문에 일곱 개의 교회라는 뜻이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예수님께 선택받은 모든 사람의 완전한 모임을 의미합니다. (묵시에서 완성된 참 교회를 의미하죠.)
 이후 7인, 7나팔, 7대접의 고난이 나오죠. 인은 ‘은닉속성’ 나팔은 ’알림속성‘ 대접은 ’준비속성‘을 의미합니다. 7은 복음적 완전수라고 했으니 복음이 은닉속성, 알림속성, 준비속성을 가지고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담겨 선택받은 자들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요한계시록1~16장입니다. 숲이 아닌 나무를 하나씩 하나씩 분류해서 설명하듯 고난을 통한 복음의 메시지를 숫자1234567로 나누고 각각의 숫자의 속성을 이용해 설명한 것이죠.
 이후 17장 부터는 나무가 아닌 숲은 보면서 전체적인 복음적 메시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17장은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를 붙잡고 있는 죄의 본질인 인본주의 정체에 관하여..
 18장은 그런 인본주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하여..
 19장은 그런 인본주의가 심판되면서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
 20장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 이 땅의 모든 역사를 천년 왕국으로 비유하면서..
 21장~22장은 결국 완성되는 예수님 나라의 모습으로 요한 계시록은 끝을 맺습니다. ]]


 18장은 인본주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상인의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본주의 가치 중 가장 높은 가치 중 하나가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인간의 욕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본주의 산물입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최초의 여자인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짓게 된 이유도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생긴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 ‘나의 기준’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준에 따라 나에게 이로운 것을 취하려는 것을 욕심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하나님께 이로운 것을 취하려는 것을 ‘선’이라고 하죠. 

 이것을 ‘나’에서 ‘인류’로 확대하면 인간은 인류의 이로움을 취하려고 노력하는데 이것을 '인본주의 선'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 인본주의 선은 선이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에 살고 있는 모든 이방인과 그들의 어린아이들과 심지어 가축까지 모조리 죽이라고 명합니다. 참 잔인하죠. 그런데 하나님의 제1번 속성은 ‘사랑’입니다. 많이 모순되죠? 

 하나님께서 당시 이렇게 까지 분명하게 명령하신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 매우 확실하게 복음의 개념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다보면 '인본주의 선'과 상당히 많이 충돌합니다. 복음은 인본주의 자체를 ‘악’ 혹은 ‘죄의 본질’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그런 인본주의에서 분리되어 예수님의 품 안으로 숨는 것입니다. 복음은 참 단순하죠. 하지만 '인본주의 선' 과의 충돌 때문에 매우 어려워집니다. 

 복음은 우리가 아는 인본주의 선조차 분리되어야 합니다. 이때 상당히 큰 갈등을 유발하죠. 정말 이것이 맞는가??? 로 고민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이방인을 다 죽이고 그 어린아이까지 죽이고 심지어 가축까지 다 죽여 버리라는 명령의 의도를 묵상하면 아주 쉽게 복음의 정답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이 부분은 방향성만 이해하세요. 이 부분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한 묵상을 하려면 페이지 수가 너무 길어져서 생략합니다. 나중에 한 번 다룰께요)

 복음의 방향성에서 보면 인본주의는 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본주의 가치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재물(돈)입니다. 그리고 상인은 이것을 위해 사는 사람을 말하죠. 그래서 오늘 본문의 상인은 실제 장사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는 모든 인간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땅의 상인들이 그(인본주의)를 위해 울고 그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없다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흩어뜨렸듯이 인간이 아무리 재물을 위해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어느 순간 그것을 무너뜨려서 재물의 가치가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재물에서 파생된 상품의 종류가 계속 나열됩니다. 총 29개 정도 되네요. 성경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촘촘히 나열한 이유는 그 만큼 재물에서 파생된 가치가 이 세상에 넘쳐나고 모든 사람들은 그 가치에 묶여 산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지막 상품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나옵니다. 즉, 사람들이 욕심 때문에 자신들의 영혼조차 사고팔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헌금을 하라고 말하는 것과 그것을 믿고 헌금을 하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교회에서 가장 시급히 없어져야 할 것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필요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하나님께서 돈을 받으시지는 않지만 그것을 드리려는 자신의 갸륵한 마음을 받으시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돈보다 더 악하고 더럽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받습니다. 교회의 헌금은 연보의 개념일 뿐입니다. 돈이 남는 분들이 모자라는 분들을 위해 나누고 흘리는 것 뿐입니다. 한달에 200만원도 못 벌어 아껴써야 하는 분들이 한달에 500만원 이상 월급을 받는 목사의  주머니를 채우신다구요?? 이것을 가스라이팅이라고 합니다. 

 15절. 다시 바벨론이 등장합니다. 바벨론은 많은 사람이 모여서 이룩한 인간 제국이죠. 고로 바벨론은 인본주의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이 바벨론에 속한 상인들이 고통스럽게 울고 애통하며 모든 상품들이 한 시간에 망한다고 합니다. 한 시간은 긴박성과 단일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긴박하게 이루신다는 것과 그것을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죄를 심판하셨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17절-19절을 보면 바다의 선장, 선객, 선원들이 멀리서 이 심판을 보면서 애통하는 장면이 나오죠. 바다는 이 세상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은혜(물)의 역사가 도도히 흐르는 것을 설명하기 때문에 이 장면은 모든 인류 역사 속에서 선택받은 자들이 이런 하나님의 심판을 계속 목격하면서 인본주의 가치를 점점 상실하게 되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애통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애통한 자가 되는 것을 20절에서 즐거워하라고 나와 있죠. 즉, 이 땅에서 상인과 같이 사는 우리의 옛 자아가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해질수록 거듭난 나의 자아는 즐거워한다는 의미입니다. 20절에서 거듭난 나의 자아를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 이라고 표현이 되었네요. 즉 거듭난 자아의 정체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된 나를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