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완료)

요한계시록19:6-10(24.11.23.토)

은혜바라기 2024. 11. 23. 08:55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 당분간 서론에서 요한 계시록을 전체적으로 분류 & 요약 & 반복합니다. 한 번 읽으신 분은 [[ 이중괄호 ]]를 생략하고 묵상하시면 됩니다. 
 요한 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예언서가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께 선택받아 구원받은 자들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복음적 관점에서 묵시 문학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물론 역사와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어느 날 같은 방향성의 사건은 계속 일어나지만 그것은 초점이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은 무서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하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미리 그 내용을 이야기해줌으로써 복음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평강을 얻게 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곱 교회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숫자 7은 복음적 완전수이기 때문에 일곱 개의 교회라는 뜻이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예수님께 선택받은 모든 사람의 완전한 모임을 의미합니다. (묵시에서 완성된 참 교회를 의미하죠.)
 이후 7인, 7나팔, 7대접의 고난이 나오죠. 인은 ‘은닉속성’ 나팔은 ’알림속성‘ 대접은 ’준비속성‘을 의미합니다. 7은 복음적 완전수라고 했으니 복음이 은닉속성, 알림속성, 준비속성을 가지고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담겨 선택받은 자들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요한계시록1~16장입니다. 숲이 아닌 나무를 하나씩 하나씩 분류해서 설명하듯 고난을 통한 복음의 메시지를 숫자1234567로 나누고 각각의 숫자의 속성을 이용해 설명한 것이죠.
 이후 17장 부터는 나무가 아닌 숲은 보면서 전체적인 복음적 메시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17장은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를 붙잡고 있는 죄의 본질인 인본주의 정체에 관하여..
 18장은 그런 인본주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하여..
 19장은 그런 인본주의가 심판되면서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
 20장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 이 땅의 모든 역사를 천년 왕국으로 비유하면서..
 21장~22장은 결국 완성되는 예수님 나라의 모습으로 요한 계시록은 끝을 맺습니다. ]]


 6절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절입니다.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다는 것은 선택받은 자들이 모두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물 소리와도 같다는 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찬양조차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큰 우렛소리와도 같다는 것은 그런 찬양은 단 한 음절도 버림 바 되지 않고 뚜렷하게 하나님께 전달된다는 의미입니다. 

 6절 마지막을 보면, ‘하나님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신다’ 라고 되어 있죠.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관계가 완벽하게 회복되는 것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준’이 나에게로부터 다시 하나님에게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옮겨지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온전한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통치)를 받게 됩니다. 이후 7절에서 보면 이것을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나옵니다. 

 7절 하반절을 보면,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천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과거 이스라엘의 혼인 풍습을 잠깐 살펴 볼까요? ( 괄호는 복음적 설명입니다.)

 1. 유대인의 결혼은 신랑,신부의 부모 계획(합의)에 의해 시작됩니다. (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복음(구원)이 계획 - 선택받은 자들(신부)가 예정됨 )
 2. 신랑은 결혼 전에 신부를 찾아서 지참금, 즉 신부의 값을 치루고 정혼식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택받은 자들을 찾으시고 십자가로 선택받은 자들의 죄 값을 치루심 )
 3. 특히 신랑의 포도주를 신부에게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4. 이후 1년이 지난 후 신랑은 저녁 때 신부를 데리고 가죠. ( 인본주의(저녁) 세상에 오셔서 선택받은 자들을 구원하여 한 몸이 됨 )
 5. 결혼은 저녁에 하기 때문에 반드시 등불이 필요함. 이 등불이 신랑과 신부를 서로 알아 볼 수 있게 함 (선택받은 자들을 성령께서 견인하여 예수님께 인도 )
 
 어떠세요? 성령께서 한 민족의 결혼 역사에까지 이렇게 깊게 개입하셔서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신비롭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이것보다 더 치밀하게 우리의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셀 정도로 우리의 구원에 관여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는 의미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잘 사는가를 꼼꼼하게 보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단 1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으시죠. 고로 우리의 구원의 여정을 매우 꼼꼼히 살피신다는 의미입니다. 

 8절을 보면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죠. 그리고 이 옷의 정체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 이라고 합니다. 이 ‘옳은 행위’ 이라는 단어의 해석 때문에 복음과 종교로 갈리게 됩니다. 즉, 심판이 발생합니다. 

 ‘옳은 행위’를 해석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나를 기준하기 때문에, 즉 인간을 기준하기 때문에 인본주의 선 행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옳은 행위’는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옳은 행위는 오직 하나 ‘복음’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만이 옳은 행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죠. 

 그래서 옳은 행위를 상징하는 세마포 옷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굳이 옳은 행위로 표현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물’이 아닌 '정체성'으로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100% 옳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진리’라고 하죠. 즉, 성도는 진리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당연히 진리란 예수님을 의미하죠. 내가 곧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니라는 구절을 기억하시죠? 그래서 성도에게 '옳은 행위'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마태복음 22장 혼인잔치의 비유로 한걸음 더 묵상을 해볼까요?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청한 사람들을 다 불러오라고 했는데 모두 이 세상의 삶(인본주의)에 바빠서 못 옵니다. 화난 왕은 이들을 모두 심판하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아무나 모두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것은 원래 천국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격과 행위로는 절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죠. 그런데 그 중 예복을 입지 못한 자를 내쫓죠. 이때 예복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지 못한 자는 천국에 올 수가 없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 잔치 비유에서 더욱 무서운 것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마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여기서 청함이란 1차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80년 인생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청함이란 '교회'에서 '성도'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대하는 시간들을 말합니다. 일요일에 교회에 앉아 있는 자들은 선택받은 자들이 아니라 청함받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 중 대부분은 종교에 머물면서 심판받아 유기된 자가 되고 택함받는 자는 적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선택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복음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기된 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 신으로 삼아 이 땅에서 나와 공동체의 행복을 빌고 내세에 좋은 장소에 가서 더 행복하려는 것이죠. 이 두 증상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흡사합니다. 하지만 그 본질을 파 보면 결정적으로 끝이 다르죠. (다를 이 끝 단=이단) 선택받은 자들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유기된 자들의 끝은 결국 '나(인간,공동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