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 당분간 서론에서 요한 계시록을 전체적으로 분류 & 요약 & 반복합니다. 한 번 읽으신 분은 [[ 이중괄호 ]]를 생략하고 묵상하시면 됩니다.
요한 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예언서가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께 선택받아 구원받은 자들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복음적 관점에서 묵시 문학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물론 역사와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어느 날 같은 방향성의 사건은 계속 일어나지만 그것은 초점이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은 무서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하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미리 그 내용을 이야기해줌으로써 복음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평강을 얻게 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곱 교회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숫자 7은 복음적 완전수이기 때문에 일곱 개의 교회라는 뜻이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예수님께 선택받은 모든 사람의 완전한 모임을 의미합니다. (묵시에서 완성된 참 교회를 의미하죠.)
이후 7인, 7나팔, 7대접의 고난이 나오죠. 인은 ‘은닉속성’ 나팔은 ’알림속성‘ 대접은 ’준비속성‘을 의미합니다. 7은 복음적 완전수라고 했으니 복음이 은닉속성, 알림속성, 준비속성을 가지고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담겨 선택받은 자들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요한계시록1~16장입니다. 숲이 아닌 나무를 하나씩 하나씩 분류해서 설명하듯 고난을 통한 복음의 메시지를 숫자1234567로 나누고 각각의 숫자의 속성을 이용해 설명한 것이죠.
이후 17장 부터는 나무가 아닌 숲은 보면서 전체적인 복음적 메시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17장은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를 붙잡고 있는 죄의 본질인 인본주의 정체에 관하여..
18장은 그런 인본주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하여..
19장은 그런 인본주의가 심판되면서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
20장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 이 땅의 모든 역사를 천년 왕국으로 비유하면서..
21장~22장은 결국 완성되는 예수님 나라의 모습으로 요한 계시록은 끝을 맺습니다. ]]
17장은 인본주의의 정체, 18장은 인본주의를 심판, 19장은 인본주의 심판 후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19장 1절의 시작이 ‘이 일 후에’입니다. 즉, ‘인본주의 심판이 끝난 후에’라는 의미죠. 이 일 후에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찬양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2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성부 하나님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심판의 모든 권한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멸망이 초점이 아니라 구원이 초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더러운 오물이 묻은 손을 물로 닦을 때 닦여지는 오물이 초점이 아니라 깨끗해지는 손이 초점입니다. 오물은 그 과정에서 단시 멸망당하는 것뿐입니다.
2절 중반에 나오는 ‘큰 음녀’의 정체는 인본주의에 속한 모든 옛 자아들의 총칭입니다. 그래서 큰 음녀는 인본주의라고 해도 되고 우리의 옛 자아라고 해도 됩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인본주의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한 몸으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고로 우리의 옛 자아는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짐승이라고도 하죠.
“에베소서2:1-3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선택받은 자들도 이 땅에서 옛 자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도 이 땅에 살면서 많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2절에서는 그때 받은 고난을 ‘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후반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피를 음녀의 손에 갚으셨다고 나옵니다.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를 인본주의와 분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란 나의 변화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한 몸이 된 나를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라고 되어 있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혹은 예배의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여기서 연기는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조금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요일에 드리는 예배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받으실까요?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받으십니다. 어렵습니다. 잘 따라오세요.
재물을 태워 연기를 드리는 것은 그 재물 자체는 의미가 없다는 것과 재물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 우리가 드리는 예배(재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님의 희생(십자가)만을 받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사의 본질적 의미는 그 제사가 의미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만을 소망케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하지만 예배는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예배가 예수님보다 앞서는 순간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시절 말씀(예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송아지를 만들어서 예배를 드렸던 이스라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장면을 깊게 생각 못하고 너무 간과하는 이유는 ‘송아지’에 시각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교회건물을 만들고, 예배 형식을 만들고, 그 안에 예배 순서와 내용을 채워 넣고, 예배 시간을 정해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죠. 당시 이스라엘도 이와 똑같이 ‘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자~~’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에피소드의 본질을 너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송아지’를 사용하여 설명하셨죠. 그런데 유기된 자들은 이 송아지 때문에 자신은 송아지 같은 우상이 아닌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집니다.
예배가 유익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 성경을 읽게 되고 그 시간에 예수님을 묵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에 하나님께 무엇(예배)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의 발을 내밀고 닦아 달라고 하는 것이 옳은 방향성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항상 나의 발을 닦아 주시고 나의 죄를 피로 덮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연기는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나의 예배는 절대 하나님께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신 성령님께서 나의 옛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 올라가면 그때는 나를 받으십니다. 정확하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시는 것이고 나는 그 분의 품 안에서 딸려 가는 것이죠.
4절, 24장로는 증명(2)된 교회(12) 12*2=24 라는 의미로 영적으로 완성된 참 교회를 의미합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이 땅에 내려와 인생을 살게 되죠.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들은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12로 표현합니다.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제자에 나오는 12라는 숫자도 그 속성이 필요해서 숫자를 마춘 것 뿐입니다.
이런 12(이 땅의 선택받은 사람들=교회)가 이 땅에서 복음을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 증명(2)이 되면 완벽한 영적 참 교회가 되죠. 이때 12는 이 땅(4)에서 성부성자성령(3) 하나님을 알게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4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땅의 숫자4입니다. 그래서 4생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24장로와 그 교회의 도구였던 4생물(이 땅 = 인생 = 역사)이 모두 하나님께 경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이 땅(4생물)에서 교회(12)로 살면서 복음을 알게 되어 참 교회가 되어 천국에 와 보니 나의 공로와 업적은 아무것도 아니였구나~~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로구나~~를 알게 되어 그 분께 경배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이라는 문을 넘어가게 되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100%로 알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이실 모습을 미리 묵시적으로 4-5절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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