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 당분간 서론에서 요한 계시록을 전체적으로 분류 & 요약 & 반복합니다. 한 번 읽으신 분은 [[ 이중괄호 ]]를 생략하고 묵상하시면 됩니다.
요한 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예언서가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께 선택받아 구원받은 자들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복음적 관점에서 묵시 문학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물론 역사와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어느 날 같은 방향성의 사건은 계속 일어나지만 그것은 초점이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은 무서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하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미리 그 내용을 이야기해줌으로써 복음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평강을 얻게 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곱 교회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숫자 7은 복음적 완전수이기 때문에 일곱 개의 교회라는 뜻이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예수님께 선택받은 모든 사람의 완전한 모임을 의미합니다. (묵시에서 완성된 참 교회를 의미하죠.)
이후 7인, 7나팔, 7대접의 고난이 나오죠. 인은 ‘은닉속성’ 나팔은 ’알림속성‘ 대접은 ’준비속성‘을 의미합니다. 7은 복음적 완전수라고 했으니 복음이 은닉속성, 알림속성, 준비속성을 가지고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담겨 선택받은 자들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요한계시록1~16장입니다. 숲이 아닌 나무를 하나씩 하나씩 분류해서 설명하듯 고난을 통한 복음의 메시지를 숫자1234567로 나누고 각각의 숫자의 속성을 이용해 설명한 것이죠.
이후 17장 부터는 나무가 아닌 숲은 보면서 전체적인 복음적 메시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17장은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를 붙잡고 있는 죄의 본질인 인본주의 정체에 관하여..
18장은 그런 인본주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하여..
19장은 그런 인본주의가 심판되면서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
20장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 이 땅의 모든 역사를 천년 왕국으로 비유하면서..
21장~22장은 결국 완성되는 예수님 나라의 모습으로 요한 계시록은 끝을 맺습니다. ]]
11장에 나온‘ 백마와 그것을 탄 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여러 모양으로 계속 바꿔어 가면서 설명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중심되는 정체성은 ‘하나님 사랑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뭔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방향에서 보면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의 주인공이시죠.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분을 마음속으로 상상한 후 그렇게 상상해서 그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마음에 믿음이라는 증상이 나오는 것이죠.
“박달자”라는 분의 초상화가 있다고 해보죠. 나는 그 분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의 초상화가 나에게 배달이 되었고 그와 함께 쪽지가 동봉되었다고 해보죠. 그 쪽지에는 ‘이 그림 속 박달자를 믿어라 그러면 행복한 사람이 된다~~‘ 입니다.
이때 박달자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는 그 초상화의 그림을 보면서 믿자~~ 믿자~~ 믿자~~ 그래야 행복해진다~~를 난발하겠죠. 이것이 ‘인본주의 종교’의 형태입니다.
그런데 박달자와 30년을 함께 산 아들에게 그 초상화를 주면서 ‘그 사진 속 인물이 네 어머니란다~~’ 라고 했을 때 그 아들은 그 초상화의 그림을 보고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해 준 사랑의 추억들을 떠 올리면서 ‘나의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되새기게 됩니다. 그 어머니의 옛 사랑을 떠 올리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사랑, 믿음, 소망 이라는 긍정적 감정들이 증상으로 발현이 되죠. 이것이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을 신으로 지정하여 (초상화의 인물 처럼 정해놓고) 나의 믿음의 감정을 계속 의지력으로 밀어넣는 것을 인본주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공통점이죠. 두꺼운 분량의 성경은 오직 예수님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이며 나와 어떤 관계인가? 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선택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옛 자아로 살아가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추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셔서 말씀을 가지고 그 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인류 전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추억을 가르치신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서 인류 전체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선택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한 단어로 표현하면 "교회"라고 하죠.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은 개별구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교회 전부를 한 개체로 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11절 후반에도 그 이름(정체성)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라고 나와 있죠.
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다고 하죠.
13절. 예수 그리스도는 피 뿌린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다시 그 이름(정체성)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고 나오죠. 이것은 요한복음 1장에도 잘 나옵니다.
“요한복음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15절은 예수님의 정체성 중의 하나가 심판자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6절은 예수님의 정체성 중의 하나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는 오직 “예수님은 누구인가?” 만 설교하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표적인 정체성이 “죄인을 구원하는 분”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도 같이 설교해야 됩니다. 설교는 이 두 가지 방향성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것도 필요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교회에서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로 끝을 맺죠. 그러다 보면 결국 예수님은 집에 걸린 초상화의 가치 보다도 못해지고 오직 ‘나와 교회 공동체의 행위’만 남게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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