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계시록에는 천국에 성전이 없다고 합니다. 즉 우리가 지금 다니는 형태의 교회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곧 성전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갈 미래의 천국 형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지역교회 혹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매몰되면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들어가 안식할 곳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심지어 계시록은 천국에 해와 달도 없다고 나옵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가장 큰 상징물 중에 하나죠. 하지만 상징물은 그 실체가 등장하면 조용히 사라져야 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갈 미래의 천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해와 달 뿐 아니라 예수님을 설명하는 그 어떤 상징들과 표지판들도 예수님 보다 앞설 수가 없습니다. 실체가 드러나면 상징은 조용히 물러가야 합니다. 상징이 계속 강조되면 실체가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해와 달도 필요 없다고 나온 것이죠.
십일조는 예수님께서 죄인 된 교회를 대표하여 십자가에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십일조는 ‘돈’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대표로 제물이 되셨다는 정체성을 십일조라는 형식에 담아 설명한 것이죠.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십일조 행위를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후대에 전달하면서 가르쳤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이런 십일조와 같은 상징은 조용히 물러가야 합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시절에는 십일조가 사라졌죠. 그 당시에는 연보라는 개념만 존재했습니다. 연보라는 개념은 돈이 많은 곳에서 없는 곳으로 흘려보내는, 즉 나누는 개념입니다. 2백만원도 벌지 못하는 성도들조차 쌈지 돈을 모아서 목사 월급 5백만원씩 채워주는 방식이 아닙니다. 심지어 차도 사주고 차량 관리비, 사택 관리비, 도서구입비 까지 내주죠. 노후 대책 연금까지 준비해 줍니다.
그러면 헌금이 줄어서 목사 월급도 주지 못하면 어떻게 하냐구요? 생각을 잘 해보세요. 그래서 못 견디는 목사들은 스스로 물러나겠죠. 그렇게 걸러지고 남은 목사들의 설교를 듣고 싶지 않으세요?
초대교회 시절 사라진 십일조는 이후 몇 백 년이 지나서 종교 지도자들이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이후 그 어떠한 목사도 과감하게 이 십일조를 없애자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목사는 모두 삯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실 수 있으시죠. 우리의 최종 과제는 교회의 품을 벗어나 예수님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유기된 자들은 “교회의 품을 벗어나라면 교회를 다니지 말고 방구석에서 예수님만 생각하라는 것이냐~~”라고 생각하죠. 그들은 뼈 속까지 행위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선택받은 자들이라면 교회에 잘 다니면서 그 교회가 가르쳤던 모든 것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본질을 끄집어내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길에 서게 됩니다.
천국은 해와 달이 없지만 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있기 때문에 25절을 보면 밤이 없다고 나옵니다. 밤은 단지 어둡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상태,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 낮과 밤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낮일 때는 사물을 잘 볼 수 있고 밤에는 사물을 볼 수 없다는 원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의 원리를 가르치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여부에 따라 우리가 영적으로 모든 것을 볼 수도 있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26-27절을 보면, 결국 모든 선택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품으로 들어간다고 나오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나옵니다. 선택받은 자들의 어떤 조건, 행위, 공로, 업적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 구원의 초점입니다.
결국 복음은 누구를 설득하여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생명책에 태초부터 기록된 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복음을 알게 되는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유기된 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행위’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약간 어렵죠?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예로 설명드릴께요.
어떤 새댁이 결혼을 해서 처음 시댁에 갔는데 제사를 지냅니다. 시어머니께서 절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때 여러 이유로 꼭 절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가정을 해보죠. 선택받은 자들은 주저 없이 절을 합니다. 그런데 유기된 자들은 절대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예상되시나요?
참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은 내가 절을 하든 말든 심지어 돼지 머리에 절을 하든 말든 그 행위가 나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기된 자들은 귀신에게 절을 하면 끝장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 절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구원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가 매우 반전이죠?
정확하게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관계가 이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율법이 금지한 일을 하셨고 죄인, 새리, 창녀와 식사 때 포도주를 드셨죠. 성전에 들어가 상을 다 뒤집어 엎으셨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욕도 하셨죠.
그러나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몇 번씩 금식을 했고 그렇게 금식한 돈으로 과부와 고아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물품을 벗어난 물품까지 확장해서 십일조를 했습니다. 모든 안식일 율법도 철저하게 지켰죠. 심지어 역사적으로 보면 이들은 성전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반전입니다.
“마태복음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결국 이런 첨예한 대립으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밖에서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행위는 가치적으로 ‘0’입니다. 그러니 하지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과 초점을 생각하라는 것이죠.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시편46 中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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