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6절의 ‘신실하고 참된지라’ 의 단어가 ‘아멘’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복음이 선포되면 우리가 ‘아멘’이라고 하죠. 즉, 아멘은 나에게 복음이 들리니 그것을 이해하고 ‘그 말씀은 참됩니다’라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목사에게 대꾸하는 것이 목적이거나, 나의 신앙을 과시하기 위해서 쓰거나, 습관처럼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죠. 그런 식으로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 보다 오히려 그 찰나의 시간조차 아껴서 복음의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6절을 보면 ‘속히’ 라는 단어가 나오고 7절에도 ‘속히’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두 번을 반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강조법입니다. 고로 이렇게 두 번 반복하는 구절은 더 더욱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속히'는 구원의 속성 중 긴박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시간이 매우 더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하실 수 없는 일이 인간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씨름한 하나님이 야곱에게 지셨던 에피소드가 이것을 의미하죠. 하나님조차 인간의 죄의 고집을 절대 꺽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품에 안고 그 죄를 예수님의 피로 덮는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답이 없는 절대부패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기된 자들이나 선택받은 자들이나 똑같습니다.
단지 선택받은 자들이 다른 점은 자신이 절대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80년 인생을 사는 이유가 이것을 정확하게 배우는 시간입니다. 정말 징글징글 하죠? 내가 죄에서 벗어나서 훌륭한 신앙인으로 변화하는 시간도 아니고 단지 내가 절대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지 모르셨죠? 우리는 반드시 이 시간을 거쳐야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과 정체성을 알게 됩니다. 그 전의 교회 생활은 모두 ‘인본주의 종교인’의 삶일 뿐입니다. 이런 시간은 100년을 쌓아 봐야 무너지는 공든탑일뿐이죠.
우리가 교회에서 많이 듣는 말씀 중 하나가 ‘성령 충만 받으라’입니다. 그랬더니 3-4시간 찬송가를 불러 재끼고 손뼉을 쳐대면서 ‘불로~~ 불로~~’ 찬송주문을 외우죠. 그러면서 눈물 한 번 흘리면 본인이 성령 충만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을 종교주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후 교회에서 나가다가 자동차 접촉 사고 한번 나면 화가 나죠. 그러면 성령님이 30%정도 빠져 나가는 듯 기분이 나빠지죠. 왜 이런 엉터리 인본주의 종교방식에 묶여 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그것이 내려지는 순간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성령께서 늘 충만히 함께 하십니다. 절대 어디가지 않으세요. 다윗이 어느 날 부하의 부인을 강간하고 거짓말로 그 부하를 죽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 계셨습니다. 즉, 선택받은 자들이라면 그 자들이 어떤 모습,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어린 아이에게 설명하듯 ‘성령 충만 받아라~’라고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엄마가 3살짜리 아이에게 ‘밥 잘 먹어라~~ 그래야 건강하단다’ 라고 한다면, 그 엄마는 그 아이가 이제부터 돈을 벌어서 시장에서 요리재료를 사서 요리를 한 후 밥을 먹어야 한다고 명령 하는 것입니까? 아니겠죠. 심지어 엄마는 3살짜리 아이 입에 밥을 먹여 주면서 ‘ 밥 잘 먹어야한단다~~’ 라고 합니다. 심지어 성령충만을 받는 것은 육체의 엄마와 아이의 간격을 아득하게 넘어가는 영적 간격입니다. 인간의 선택과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자들도 살다가 무수한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성령님은 늘 충만하게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복음을 점점 더 알게 될 수록 이런 사실들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아무 잘못도 없는 마누라를 직장 상사에게 팔아넘기는 최악의 행태를 보일찌라도 그의 상태는 성령충만한 상태입니다.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려고 아내 사라를 두 번이나 이방 왕에게 팔아 넘겼죠. 심지어 그 아들 이삭도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속 아브라함 곁에 머물면서 그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왕을 혼내주시죠. 그것을 본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왕 보다 하나님이 더 강하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복음의 길을 1센티 전진합니다. 다윗도 강간, 거짓말, 살인 이후에 나단 선지자에게 복음을 듣고 다시 복음의 길을 1센티 전진하죠. 인본주의 악 >> 인본주의 선 의 방향성이 아니라 인본주의 >> 예수 그리스도의 방향성입니다.
우리가 가진 죄의 본성과 어리석음 때문에 복음을 알아가는 것이 오래 걸리지만 하나님은 가장 빠른 길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7절 하반절을 보면 ‘두루마리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가? 의 해석의 문제가 남습니다. 보통은 이것을 ‘나의 행위’로 해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말씀을 본질적으로 단 1구절도 제대로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말씀을 자기의 낮은 기준으로 해석하여 지켜냅니다. 그것을 ‘외식’이라고 하죠. 겉으로 보면 지킨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지켜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본인은 ‘나는 잘 지키고 있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조금 다른 증상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이 절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구나~~’라는 예수님의 필요성과 정체성을 하나씩 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계속 소망하게 되죠. 정말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오묘하지 않습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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