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완료)

요한계시록22:10-13(24.12.13.금)

은혜바라기 2024. 12. 13. 08:32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0절 두루마리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고 하죠. 인봉의 의미는 말씀의 은닉성을 의미합니다. 말씀 안에 있는 복음의 은닉성이 얼마나 깊은지 한번 볼까요? 즉,  실제 말씀 속에 복음이 얼마나 깊게 숨겨져 있는지 볼까요? 

 “마태복음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이것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산상수훈의 한 구절입니다. 보통은 이 구절을 더 많이 베풀면서 살아라~~ 라고 해석을 합니다. 정말 그것뿐일까요? 

 사막 기후에서 속옷은 기능을 위해 입는 옷이지만 겉옷은 생명을 지키는 옷입니다. 저녁에는 추위를 막아주고 낮에는 뜨거움을 막아주죠. 고로 고발하는 자에게 기능적 속 옷 뿐 아니라 내 생명을 지키는 겉 옷, 즉 생명까지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요? 

 그래서 ‘행위’에 속한 자들은 이 구절을 절대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수준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고 스스로 타협합니다. ‘가능한 남에게 베푸는 마음으로 살자’ 정도로 해석하죠.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기준으로 그렇게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본질은 누가 나에게 말씀의 교훈을 가르쳐 달라고 할 때 그에게 교훈 뿐 아니라 그 말씀의 본질인 복음까지 가르쳐 주어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교훈'은 포장지의 기능을 하는 기능적 도구일뿐이며 '복음'이 진짜 본질인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깊게 들어가서 해석하면 이 구절을 지켜 내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고발하여 십자가에 매단 모든 죄인들을 자신의 생명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구원하셨죠. 

 선택받은 자들도 처음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 말씀을 교훈으로 듣고 지키면서 종교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이 말씀을 자신이 절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갈등하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때 성령께서 오셔서 겉옷(복음)을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속에 은닉되어있는 복음을 선택받은 자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오늘 본문 10절에서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입니다.

 그러면서 11절을 잘 보세요. 불의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불의하고 더럽게 행하게 나두신다고 하죠. 말씀을 자신의 수준으로 해석한 후 실행하는 모든 행위는 불의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냥 놔두는 것이 심판입니다.

 

 반대로 의롭고 거룩한 자는 의롭고 거룩하게 행하게 된다고 하죠. 의롭고 거룩한 자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이 말씀을 절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여 그 분의 품 안으로 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 의롭고 거룩한 자가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합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품에 들어감으로 인해 의롭다고 여김받는 것 뿐입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하죠.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같은 의미를 반복하여 강조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많이 알던 구절이죠. 이 구절 안에는 어떤 하나님의 의도가 있을까요? 모든 세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 표지판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시작도 예수님, 마지막도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그 결과를 기대하고 반대로 어떤 결과가 나오면 그 원인을 찾게 됩니다. 이것을 ‘인과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인과율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심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천지창조와 멸망은 한 세트죠. 성경은 천지창조와 함께 이 세상의 멸망을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망할 세상을 전지전능하신 분이 만든다?? 명백한 모순입니다. 고로 이 천지창조는 어떤 명백한 다른 의도로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명백한 의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예수님과 예수님이 선택한 그 분의 신부 때문입니다. 이 신부를 교회라고 하죠.(우리가 다니는 지역교회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참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한시적인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온통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죠. 여기를 봐도 예수님, 저기를 봐도 예수님, 원인을 봐도 예수님, 결과를 봐도 예수님. 이것을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본질적 가치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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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참 복음을 단 한 사람이라도 같이 고민하고 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 한 분이라도 그런 분이 곁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런 분께 이 묵상을 전해주시고 함께 고민하세요.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들만 그 분의 음성(복음)을 듣게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삶에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묵상을 함께 나누십시오.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할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