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드디어 요한계시록 마지막 묵상이네요. 그동안 묵상하시느라 고생했습니다. 오늘 묵상은 조금 길게 합니다.
복음은 매우 단순합니다. 성경도 매우 단순합니다. 성경을 한 단어로 줄이면 ‘예수님’ 입니다. 그리고 제가 매일 쓰고 있는 이 묵상도 주제가 항상 같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쉬지 말고 묵상(기도)을 해야 합니다.
매일 30분씩 말씀을 묵상하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내내 나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선택받은 자들이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인본주의 삶 속에 다시 묶이게 됩니다. 물론 깨어 있게 하는 분도 성령님이시고 우리가 인본주의에 묶여야만 우리가 얼마나 처참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므로 그런 시간조차 이용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죠. 고로 여기에는 성령님의 '신비'라는 섭리가 작용합니다.
제 묵상을 꾸준히 읽으실 정도의 분이라면 기독교 교회 생활을 많이 하신 분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런 분들이 가장 잘 넘어지는 함정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조차도 인간이 만든 인본주의 종교일 뿐이죠. 오직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계획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인간의 누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허락하시고 성령님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도구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성령님의 '신비'라는 섭리가 작용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우리도 이방나라처럼 왕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나를 버린다’고 하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왕을 허락하셨습니다. 이후 열왕기와 역대기의 모든 왕들을 사용해서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죠.
인간은 성령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본주의 산물에 묶여버립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입니다. 이런 상황은 정작 농사지어야 할 땅을 옆에 두고 일 년 내내 ‘옆집 땅’에 농사를 짓는 꼴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내가 농사짓는 곳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나의 땅인가?를 확인하는 것을 묵상(기도)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16절에서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죠.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은 인간이 선택한 왕입니다. 인간의 기준에서 가장 완벽하고 매우 잘 생긴 왕입니다. 이 의미는 단지 얼굴이 멋지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본주의 기준으로 가장 적격인 왕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실패한 왕이 되었죠.
그리고 인본주의 가치로 볼 때 전혀 왕 같지 않은 가문의 가장 작은 다윗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선택받았습니다. 다윗은 행위로 선택받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선택)에 의해 선택받았죠. 이것이 선택받은 자들의 정체입니다. ‘행위’가 아닌 ‘선택’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선택받은 자들의 첫 열매이시죠. 예수님께서 다윗의 뿌리며 자손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모두 가지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모든 선택받은 자들(교회)의 근본이기도 하고 그 각각의 사람들과 한 몸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한 순간에 십계명의 6-10계명을 전부 어긴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시기에 말이죠. 그 시기는 다윗이 가장 부흥했을 당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충신의 부인을 탐하여 강간하고 결국에는 빼앗습니다. 그리고 그 부하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그 충신을 살인하였죠.(6계명~10계명) 하지만 그는 선지자 나단(성령님의 상징)을 통해 복음을 듣고 깨닫게 됩니다. 유기된 자들은 이 에피소드를 통해 ‘다윗과 같이 행동하지 말자~~’를 배우겠지만 선택받은 자들은 그들이 다윗과 같은 삶, 즉 옛 자아의 죄의 삶을 살다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면서 복음을 한 눈 끔 더 알게 되는 삶을 반복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죠.
우리의 목적은 이 땅에서 선한 삶,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비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계속 깨달으면서 오직 예수님 밖에는 없구나~~ 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광명한 새벽 별’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은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어두워 못 볼 뿐입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설명 도구가 ‘빛’이죠. 밝음을 주는 빛, 생명을 주는 빛, 멸균(심판)하는 빛 등등 빛의 모든 속성은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도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물질은 없습니다. 그리고 빛이 왜곡되면 시간과 공간조차 왜곡되죠. 즉, 시간과 공간조차 빛의 주권 하에 있다는 뜻입니다.
자연에서 빛의 근원은 태양이므로 태양도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태양을 받아야만 빛을 내는 달은 ‘성도’를 의미하죠. 또한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지구(땅)도 '성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과 한 몸 된 성도들이 무수히 많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밤하늘의 별들입니다. 그 중 가장 광명하게 빛나는 새벽 별이 모든 별들의 우두머리, 즉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18-19절에는 매우 무서운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제하면 멸망받는다고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속 본질인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의미합니다. 그 분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죠. 하지만 많은 교회에서 복음에 누룩을 섞어서 선포하거나 아애 복음을 생략하고 ‘성도들의 행위’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선택받은 자들이라면 그런 설교조차 성령께서 복음으로 가공하여 듣게 하십니다.
(( 제가 여행 중에 일요일이 되어 근처 교회에 가려는데 교회가 없어서 성당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한국 기독교는 성당을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그 날 신부님께서 이런 저런 설교를 하셨는데 조금 이상했지만 당시 설교 말씀 중에 ‘이스라엘이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 안에 숨어서 구원을 얻었다’라는 단 한 문장에 저도 모르게 집중되어 신부님의 설교와 상관없이 예배(미사) 내내 홀로 깊은 묵상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누가 강대상에 서 있었는가? 설교의 전체적인 메시지가 무엇인가? 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 어느 곳이든 말씀이 존재한다면 그 자리에 선택받은 자가 있는가? 없는가? 가 더 중요한 초점입니다. 실제로 그들을 가르치는 분은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선택받은 자들은 불교의 팔만 대장경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자비’는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묵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20절,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죠. 이것은 미래에 오실 재림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큰 초점은 각각의 선택받은 자들의 인생에 단 1 초의 낭비도 없이 예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최후의 예수님의 재림 순간도 반드시 오겠죠. 하지만 예수님의 최후의 재림 순간은 모든 선택받은 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모든 개입을 한 순간에 보여주시는 것 뿐 입니다. 세 시간짜리 영화가 끝난 후 주인공이 세 시간 동안 개입했던 모든 상황을 엔딩에서 한 장면에 실어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끝을 맺는 광경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21절, 요한 계시록의 마지막입니다. 성경 전체의 마지막이죠. 즉, 성경이 이야기하고 싶은 모든 결론이 이 한 줄이 다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자는 선택받은 모든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예상했듯이 마지막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끝이 납니다. 성도들의 행위는 온데 간데 없죠. 오직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후 나온 ‘모든 자’는 모든 선택받은 자들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자들 이외의 사람들은 단 1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린아이까지 죽이라고 했고 노아의 방주 시대에도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자들을 다 멸망시킨 것입니다. 이것을 너무하다~~ 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참 사랑의 속성’입니다.
즉, 내가 사랑하는 여자만 보고, 생각하고, 걱정하겠다~~ 는 선언입니다. 아무리 예쁘고 똑똑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들이 나의 여자 옆에 서 있더라고 단 1의 시선도, 관심도, 호기심도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이럴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가능하신 분이시죠.
하나님께서는 유기된 자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유기된 자’입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잘 살든지 못 살든지 행복한지 불행한지 하나님께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관여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들을 ‘짐승’이라고도 합니다. 이들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도구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들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유기된 자들조차 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오직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죠. 그래서 성경은 이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칭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님의 은혜와 선택만이 내가 선택받은 자인가? 유기된 자인가?를 구분할 뿐입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이 누구인지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알게 됩니다. 선택받은 자들에게서 나오는 독특한 증상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가치, 무능력한 절대부패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반대로 유기된 자들에게 나오는 증상은 나의 행위를 쌓고 또 쌓죠. 헌금을 쌓고, 봉사를 쌓고, 인맥을 쌓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많은 사람에게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훌륭한 크리스찬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처세술’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처세술을 잘 해서 인맥을 잘 쌓는 교회 인맥 기술이 좋은 사람인 것이죠. 특히 목사의 성품에 너무 기대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교회 안을 뒤집어 엎고 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욕을 하고 다니신 분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역설적입니다.
오직 겸손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그것을 잘 알게 되어 오직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 품 안에 숨는 것입니다. 자신의 교만이 너무나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요한 계시록의 모든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후 묵상은 [마가복음]을 하겠습니다. [마가복음]만 묵상하면 4복음서를 다 묵상하게 되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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