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진행중)

마가복음1:2-5(24.12.19.목)

은혜바라기 2024. 12. 19. 08:04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2-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자와 그것을 광야에 외치는 자는 세례 요한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요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로 요한은 구약에 나온 모든 선지자 중 가장 마지막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예수님을 가장 정확하게 가리키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을 가면 계속 이정표가 나옵니다. 그 이정표는 부산에 가까워질수록 “부산까지 100km” “부산까지 5Km” 라고 나오면서 점점 더 목적지를 정확하게 가리키죠. 이처럼 구약의 모든 이정표 중 예수님을 가리키는 가장 마지막이자 정확한 이정표가 세례 요한입니다. 그래서 요한 자체는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정표는 단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 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 제사, 에피소드 등등 구약의 모든 내용들이 전부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정표입니다. 

 또한 성경만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온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류 역사 그리도 자연법칙과 과학법칙까지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질서조차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역순으로 반복해서 설명으리면 온 세상 만물과 질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완벽하게 핵심 정리한 것이 성경입니다. 특히 구약은 예수님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이 곳곳에 등장하여 구약의 방대한 모든 사건, 제사, 율법을 해석하고 선포하였죠. 그런 모든 선지자들의 마지막 대표로 요한이 등장하였는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면서 구약의 모든 손가락을 요약한 것이 “회개하라”입니다. 즉, 예수님의 필요성과 정체성은 '회개하라'와 맞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왜 ‘회개’일까요?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의 정의는 ‘하나님과 분리됨’입니다. 살인, 간음, 절도, 거짓말 같은 것은 죄가 아니라 죄의 증상입니다. 그리고 ‘죄’의 정확한 상태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란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다시 그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죠. 거짓말 하던 사람이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반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처럼 반성과 회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반성은 어느 종교에나 존재합니다. 심지어 유치원에도 존재하죠. 반성은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뉘우침과 다짐이 필요합니다. 회개는 정 반대 방향입니다. 회개는 내가 절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더라’ 라고 나옵니다. 이것이 회개일까요? 아닙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잘 따라오세요. 

 지금 요한은 여러분 보다 복음을 모릅니다. 요한은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선지자들 중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정표일 뿐이죠. 하지만 여러분은 이미 이정표를 지나 목적지(예수님)에 들어와 있습니다. 즉, 복음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요한의 지금 상황을 비웃어(?) 줘도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누가복음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고로 오늘 본문에 나온 요한은 얼치기 종교인의 행태를 보이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용하신 것이죠. 요한의 행태(선포)가 성경에 기록이 된 순간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바뀌면서 그 안에 숨겨진 복음의 속성을 성령님께서 여러분께 알려 주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런 역설적이면서 이중적인 해석방식에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지금 요한이 선포한 회개는 사실 ‘반성’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도 ‘반성’을 한 것뿐이죠. 이들이 구원을 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반성과 세례로는 절대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장면은 구원의 조건인 ‘회개’를 ‘반성’이라는 인본주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어찌 보면 ‘회개’라는 단어도 정확하게 구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즉, 반성, 회개, 세례 등등의 모든 단어들은 결국 복음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태초에 이미 정해져 있고 때가 되면 성령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시죠.

 그렇게 복음을 알게 된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의 가치와 이 땅의 가치가 점점 사라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만 늘어나면서 예수님만을 소망하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려니 회개, 반성, 세례, 회심, 거듭남, 자기부인 등등의 단어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알게 된 선택받은 자들은 이러한 단어 하나로 자신의 구원받은 상태를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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