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신으로 생각하고 그 분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예수님을 믿음이라는 감정을 독려해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본주의 종교’일 뿐이죠.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를 전부 이 과정을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종교는 다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 종교는 인간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죠. 죄의 정의는 ‘하나님과 분리됨’입니다. 살인, 간음, 절도, 거짓말 같은 죄는 죄가 아니라 죄의 증상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함께 연합되어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선악과 에피소드 처럼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 인간 본위(기준)의 삶을 살게 되었죠. 이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 속에는 짐승과 다르게 늘 하나님을 찾는 통로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그 통로로 하나님을 찾지 못하므로 자신이 만든 다른 신으로 채우죠. 그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종교성’은 절대 버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특정 연예인을 우상처럼 받드는 것도, 돈을 우상처럼 여기는 것도, 나 자신을 우상처럼 여기는 것도, 가족과 자식을 우상처럼 여기는 것도 모두 ‘종교성’의 일환입니다.
인간은 절대 종교성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교’를 도구로 삼아 복음을 설명하시는 역설적인 방법을 선택하셨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첫 만남도 기독교라는 종교를 접하면서 시작되죠. 하지만 대부분은 평생 종교로써의 기독교에 머물다가 죽습니다. 이것을 잘 설명한 에피소드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송아지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실체인 말씀(예수님)을 모시고 내려오지 않자 송아지를 보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면서 종교활동을 시작했죠. 매우 극단적인 상황의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나는 저렇게 어리석지 않은데~~’ 라고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교회의 모든 종교활동은 이처럼 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우기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모두 이같이 신앙생활을 할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오셔서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을 찾으시죠. 이 사람들을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즉,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창세 전에 예정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서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완성, 즉 구원은 2단계로 나누어 진다고 말씀하셨죠.
“마태복음13:47-48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고로 우리는 기독교라는 종교(그물)로 예수님의 만남을 시작하지만 실제 심판은 그 시간부터 시작됩니다. 이 안에서 좋은 것과 못된 것으로 가려지죠. 일반적으로 교회는 이 말씀을 가지고 ‘못된 것이 되지말고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것이 되자~~’ 의 잘못된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이런 방향성을 인본주의적 방향성이라고 합니다. 좋은 것과 못된 것은 이미 태초에 나누어져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것을 기가 막히게 찾으시죠. 성령께서 좋은 것(선택받은 자)을 찾게 되면 선택받은 자들에게 그 증상이 나타납니다.
그 증상은 인본주의 가치가 상실되면서 마음이 가난해지고 애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이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커지면서 예수님만 소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좋은 물고기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게 되면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하죠. 여기서 ‘이름’이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기도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수리수리 마수리 주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을 안 사람들만 기도할 수 있으며 이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하실 것입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어떠세요? 예수님은 종교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느끼시나요?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라 진리, 생명 그리고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의 정체성 중 하나가 소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하나님이시죠. 그런데 그 분은 심지어 피조물인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매우 중요한 정체성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눈치채셨죠?
바로 ‘인자 예수님’입니다. 완벽하게 하나님의 지위를 버리시고 인간의 지위로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모든 죄인들의 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나’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모두 하시게 됩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지금부터 해야 할 모든 것은 원래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정체성 중의 하나입니다. 내일 묵상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로 내 몰려서 시험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원래 나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다 이겨내야만 구원을 얻게 되죠. 하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이 시험을 단 0.1%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 대신 이겨내신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이 모든 과정을 나 대신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고 가시는 장면들 그리고 결국에는 나 대신 십자가까지 지시고 나의 죄를 감당하신 장면이 와 닿나요? 이 하나 하나가 전부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이 모든 예수님의 정체성이 이해가 되시는 사람이 ‘우리 자녀들 수능 시험 잘 보게 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즉,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 중에 복음에 눈을 뜬 분이라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정체성 중 하나가 ’예수님은 나로 오셨다‘라는 것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라는 장면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하신 말씀이지만 이것은 나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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