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4:1-2(21.08.10.화)

은혜바라기 2021. 8. 10. 08:57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오늘의 묵상은 너무도 유명한 예수님의 광야 시험입니다.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되는 것인가? 복음의 눈으로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인자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확히 아셔야합니다. 

 인자 예수님란 뜻은 ‘선택된 나’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내가 하나라는 개념이 잡혀야 합니다. 물론 이 개념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같이 완벽한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방향성은 이해하고 계셔야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절대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로 오셔서(나 대신 오셔서)사신 것이죠. 홍길동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명이 아니기 때문에 홍길동 대신에 인자라는 단어를 넣어서 인자 예수님이라고 쓰신 것입니다.  즉, 올바른 복음의 방향성은 예수님이 2천년 전에 나로 오신 것이고 지금의 나는 예수님의 어깨 위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여정인 셈입니다. 

 ‘광야’라는 뜻은 복음의 진영에 있는 자가 바라보는 이 세상을 뜻합니다. 인본주의에 속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잘 살기’의 목표가 되는 바벨탑으로 보죠. 그러나 이 바벨탑의 ‘무의미함’을 알게 된 복음의 진영에 있는 자들은 이 세상의 ‘무가치함’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이 세상은 ‘광야’입니다. 

 ‘사십일’에서 4는 동서남북 ‘땅’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인생’이라는 ‘시간과 공간’ 전부를 뜻합니다. 4*10=40이죠. 이 때 10은 완전 수입니다. 고로 40일이란 ‘전 인생’을 뜻합니다. 4와 6을 혼동하시면 안됩니다. 4는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뜻하고 6은 그 인생을 인본주의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인생 자체는 매우 진지하게 사셔야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복음이라는 3(하늘의 숫자)을 찾아서 7(천국)로 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4라는 인생을 '잘살기'라는 인본주의에 갖혀 버리면 영원히 7에 모자라는 6에 묶여 있게 되는 것이죠. 이 6은 얼핏보면 하늘을 흉내내고 있죠. 그래서 하늘의 숫자인 3(세개)을 늘 따라 하는 666(세개(3)를 따라하는 6)의 형상을 갖게 되죠. 고로 이 666의 정체는 '천국을 따라하는 인본주의'가 됩니다. 즉, ' 나는 저런 큰 집에서 살면 여한이 없어', '나는 내 아들이 서울대학만 들어가면 지금 죽어도 좋아' 등등의 마음이 전부 다 666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40일은 예수님이 나의 인생을 사신 것을 뜻합니다. 

 ‘금식’은 이 땅이 주는 음식, 즉, 인본주의의 모든 산물과의 분리를 뜻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인본주의의 산물에서 완벽하게 분리된 삶을 사신 것을 의미하죠. 즉, 예수님이 40일인 인생을 나(인자)로 사시면서 완벽하게 인본주의와 분리된 삶을 사신 것을 가리키죠. 오직 예수님만 죄(인본주의)에서 분리되신 분이시죠. 오직 예수님만 거룩하시죠. 

 ‘마귀’의 정체는 정확하게 우리의 옛자아입니다. 물론 마귀는 타락한 천사죠.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우두머리(루시퍼)에게 매우 많은 권한을 주셨는데 그 권한을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노려 하나님께 대항하려다 이 땅에 떨어진 영적 존재죠. 그런데 이 사실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모순된 존재로 만드는 꼴이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모순된 분이 아니죠. 고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죠. 왜 이런 상황을 만드셨을까? 그 답은 바로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라도 ‘그 무엇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의 비참함을 뜻하겠죠. 그런데 이런 사탄의 모습은 정확하게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즉, 사탄은 죄 된 인간이 스스로의 참담함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만든 ‘객관화 된 나’인 것입니다. 즉, 인간을 위해 만드신 ‘거울’이 바로 사탄이죠.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시험’이란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시험이란 단어를  test(시험)과  temptation(유혹)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시험이던, 유혹이던 전부 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초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죠. 즉, 이 시험과 유혹을 통해 선택한 백성이 복음을 알아가도록 하셨죠. 

 이런 시험을 예수님이 3번 받게 됩니다. 3이란 숫자는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숫자, 하늘의 숫자, 즉, ‘복음을 설명한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인생을 통해 받게 되는 시험을 절대 인간은 통과할 수가 없죠. 그래서 인자 예수님이 나 대신 이 세상에 오셔서 나로 사신 것이죠. 그것을 마태복음4장 광야의 시험을 통해 압축하여 공개한 것입니다. 이 시험을 통하여 복음에 대하여 무엇을 설명하실까요? 그것은 내일 알아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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