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3:1-10(21.07.29.목)

은혜바라기 2021. 7. 29. 08:45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장면은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시키기 위하여 표현한 모습입니다. 요한과 엘리야는 다른 사람이지만 복음적으로 같은 역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무슨 역활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의 역할입니다. 즉, 예수님이 오시기 전 모든 선지자 혹은 모든 선지자의 말씀, 즉, 구약의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기 위한 표지판이라는 것입니다. 

 ‘낙타털 옷, 가죽 띠, 메뚜기, 석청’ 단어 하나 하나를 역사적, 문화적으로 연구하여 그것을 복음으로 풀어 내는 방식도 옳은 방식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단어의 의미 해석에만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하다 보니 길을 잃어 버리죠. 우리는 조금 쉽게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의 물건들은 모두 광야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즉, ‘광야의 삶’에 완벽하게 속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적으로 광야는 선택받은 백성이 꼭 거쳐야하는 과정이죠. 출애굽을 하게 되면 바로 광야의 삶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인본주의적 삶의 가치를 잃고 마음이 가난해진 자의 삶을 뜻합니다. 

 표지판으로써의 모든 선지자들의 역할을 성경에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도 하고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표현도 하고 있죠. 예수님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했죠. 여기서 여자는 교회를 뜻합니다. 즉, 교인 중에 예수님을 가리키는 가장 가깝고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도 요한보다 크다고 했죠. 복음을 가리키는 자의 역할보다 복음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선택된 자들의 마음속에 침노해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은혜가 크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죠.

 요한이 복음되신 예수님을 가리키기 위한 첫 한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입니다. 이 후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 라고 되어 있죠. 이들이 과연 진정한 회개를 하였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이 자들은 당시 선지자로 인정 받고 있는 요한의 말에 반응하여 반성을 했던 것 뿐입니다. 

 교회에서 학생 수련회에 가보면 많은 학생들이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진정한 크리스챤으로써의 도약의 시간을 갖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죠. 그런데 이것은 복음에서 말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반성’입니다. 이런 반성은 어느 종교에나 다 있죠. 여름 불교 학교에서도, 심지어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이런 반성을 통하여 새사람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적 반성입니다. 그 반성을 통해서 인본주의적 단계가 성숙된 것이죠. 절대 회개가 아닙니다. 술,담배를 끊고 집사로 임명되면 이상하게도 교회에 열심히 나가게 되죠. 반성을 통한 인본주의적 성숙을 복음적 회개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

 그럼 회개란 무엇일까요? 진정한 회개란 ‘인본주의’관점을 벗어나서 ‘복음’의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세계관, 인간론, 죄론, 신론, 교회론이 전부 바뀌어 버리죠.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반성은 회개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한이 회개하라고 했더니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나오죠. 이 유대인들이 나중에는 결국 예수님을 죽이거나 예수님을 저주하고 도망가죠. 단 한사람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성하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은 회개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는 인본주의 종교관에 묶여 이 장면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죠.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이 장면에서 복음의 설명을 듣습니다. 

 즉, ‘자기들의 죄’는 바로 ‘인본주의’를 뜻합니다. 그리고 요단강은 ‘분리’를 뜻합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인본주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옛자아의 죽음과 분리를 뜻하고 복음의 진영에서 보면 물로 표현된 은혜 속에서 걸어 나와 거듭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새로운 창조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죠. 이렇게 바뀌는 것이 바로 ‘회개’의 정의입니다. 기껏해야 술, 담배 끊고 새벽 예배에 가서 울고 짜고 반성해서 새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비교 자체가 불가입니다. 결론적으로 회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만 할 수 있는 일이죠. 

 

 회개은 죄를 반성하여 변화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질을 꽤 뚫어 보는 것입니다. 나의 본질은 티끌(nothing) 혹은 죄일 뿐이죠. 그리고 이것은 감정과 이성을 통하여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보여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보여 주실 때 '아~ 이거구나'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죠. 이 믿음이 동반되면서 나의 죄된 본질이 확인되고 나에겐 변화될 수 있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래서 나의 외부에서 소망을 찾게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소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반성과는 전혀 다르죠? 반성을 하여 변화된 행동을 하는 것과 회개를 하여 소망없는 나를 버리고 오직 예수님께만 소망을 품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 종교와 복음의 차이입니다. 

 이런 회개의 본질적 정의를 가지고 그 다음 말씀을 보시면 더욱 자명합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반성하고 있는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죠. 우리의 반성은 전부 인본주의 단계의 성숙일 뿐입니다. 더 무서운 말로 정의해드리면, 바로 우리가 자주 말하는 ‘인격적 성숙’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성을 통해 인격적 성숙을 이루는 것을 인본주의에서는 최고로 여기죠. 그러나 복음의 눈으로 보면 이것이 바로 ‘독사의 간교’입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바로 ‘인격자’입니다. 이것은 완벽하게 복음과 반대가 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격자 코스프레에 넘어가서 스스로 인격자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쳐야 하는지 아십니까? 이것은 돈을 벌기위해 발버둥치는 것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둘 다 바벨탑의 꼭대기일 뿐입니다. 한쪽은 좌측 꼭대기 다른쪽은 우측 꼭대기일 뿐이죠.  이 ‘인격자’를 유대인의 언어로 표현하면 ‘바리새인’입니다. 인격을 버리십시오, 오직 예수님의 옷만 입으셔야합니다. 예수님의 등에 숨어야 합니다. 나의 죄 된 인격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품에 숨어 사셔야합니다.

 

 인격을 버리라는 말을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막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은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격을 버리라는 말도 그자들에게는 결국 '그럼 막살라는 말이냐?'로 묶여 버리거든요. 그러나 이 말도 선택받은 자들은 '그렇치 인격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의존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지~!!!'라고 이해해 버립니다. 이렇게 일일이 설명을 해야만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아~~ 이 말이 그말이야~~' 하며 이해를 하죠.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이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 스스로 복음으로 해석하는 자들이죠. '  즉, 소경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것과 눈을 뜬 자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의 차이가 나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는 것'이 목적입니다 눈을 떠서 복음을 직접 보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회개를 하는 것인가? 오늘의 말씀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라고 나오죠. 그런데 여기서 과연 ‘열매’가 무엇일까? 여기서도 바로 인본주의 종교와 복음이 분리가 됩니다. 인본주의 종교의 해석은 뻔하죠. 변화된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말하는 열매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특히 ‘첫 열매’이시죠. 이 열매인 예수님을 맺지 못하면 ‘찍혀 불에 던져지니라’고 하죠. 심판입니다. 

 예수님을 맺는 것은 예수님처럼 행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초점을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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