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3:11-17(21.07.30.금)

은혜바라기 2021. 7. 30. 09:43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회개케 하기 위하여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푼다고 하고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합니다. 어제 회개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회개란 반성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것을 뉘우치고 변화된 행동을 하는 것이 반성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께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반성은 주체가 ‘나’가 되는 것이고, 회개는 주체가 ‘예수님’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초점입니다. 촛점은 마음과 행위의 변화가 아니라 주체의 이동입니다. 

 

 '반성'은 회개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놓으신 이 땅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반성은 회개를 가리키는 상징일 뿐이죠. 실체인 회개을 깨닫지 못하고 이 반성에 묶여 버리면 '반성 전의 나쁜 놈'일 때 보다 복음적으로는 더 안좋은 길을 걷게 됩니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성경 말씀이 있죠. " 더러운 귀신( 한마리 )이 사람에게서 나갔는데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다시 들어가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 이 악한세대가 이렇게 될 것이다. " 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더러운 귀신 (한마리)'은 '인본주의적 나쁜 행위 '를 뜻합니다. 그리고 악한 귀신 일곱은 '인본주의적 선한 행위 ' 즉, 반성을 한 후 괜찮은 사람이 된 것으로 완벽하게 착각을 하고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인격자로 사는 것을 뜻하기도 하죠. 인격이 휼륭한 목사로 사는 것을 뜻하기도 하죠. 자신이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나쁜 놈이라는 것은 인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크죠. 그런데 자신이 정말 휼륭한 인격자로써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절대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도 휼륭한 신앙인의 조건에 해당하기 때문에 하는 고백일 뿐이죠.

 

 우리의 인격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아야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대인 사역인 십자가의 강도의 구원을 보셔요. 이 자는 완벽하게 예수님으로 부터 구원의 확증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직전까지 이 자는 완벽하게 나쁜 놈으로 살았죠. 그리고 숨 넘어가지 전까지 인격적으로 완성되거나 행위가 완벽하게 변화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이런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강도의 고백처럼 '내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님의 기억만이 필요합니다.'라는 고백만이 필요할 뿐이죠.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은 '나의 인격, 나의 행위, 나의 변화'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기준'에 달려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물론 예수님께 모든 소망을 두고 이 땅에서 나의 옛자아와 살아가다보면 다른 사람의 눈에 '인격자'로 보이게 되는 순간들이 있긴 하죠. 그러나 이것은 인격적인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격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삶을 살기 위해 거쳐가는 정거장일 뿐입니다. 조금 어렵죠? 하나님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때로는 사람도 죽이시고, 포로 생활을 하게 하시고, 부모를 거역하게 하시죠. 그러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모를 공경하게도 하시고, 거짓말을 하지 않게도 하시죠. 즉, 인격자의 길을 걷게도, 비 인격자의 길을 걷게도 하시면서 우리의 무가치함을 드러내시죠. 이 과정 중에 인격자의 길을 잠깐 걸을 때도 있겠죠. 이 때 타인의 눈에는 '인격자'로 보이긴 하겠죠.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이 잠깐의 '인격자'의 삶의 길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언제든 다시 비인격자의 길을 걷게 만드시면서 결국 '난 예수님이 필요하다' 는 목적을 이루어 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죠. 이런 개념은 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므로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죠. 

 

 구약에 보면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나누어져 있죠. 그리고 이렇게 나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부정한 짐승인 돼지고기를 절대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이상하지 않나요? 부정한 짐승은 도대체 누가 창조한 것일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죠. 그럼 하나님은 부정하신가요? 그럼 선한 하나님이 아니죠. 그럼 잘못 만드셨기 때문에 부정하다고 하셨을까요? 그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죠. 완벽하게 모순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모순이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인본주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눈으로 보면 '부정한 짐승'은 부정한 짐승이 아닙니다. 즉, 부정한 짐승도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선한 짐승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부정한 짐승의 역할'을 맡은 것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위해 부정한 짐승의 역활을 맡은 짐승은 매우 선한 짐승"이 되는 것이죠.  이 개념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베드로를 깨우쳐 주기 위해 고넬료의 부정한 음식 사건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결론은 "하나님이 깨끗하다고한 것을 너가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먹지 않겠다던 부정한 음식들이 바로 하나님 스스로 구약에서 부정하다고 정해놓으신 것들이죠. 즉, 인본주의적으로 하나님은 상호 모순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으로는 하나님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예로 이 세상에 인격자와 비인격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해도 복음적으로는 두 종류의 사람 모두 귀신들린 자들로 봅니다. 즉, 모두 철저한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격자의 삶이 더 끔직하다고 표현하신 것이에요. 그 이유는 비인격자는 자신의 모자람을 알고 인격자는 스스로 괜찮은 삶을 노력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들이 실체적 회개를 하는 데 더 빠를 것 같습니까?  '도둑놈과 목사' 중에 누가 더 복음을 잘 받아 들일 것 같으세요?  물론 성경 이해는 목사가 훨씬 잘하겠죠. 그러나 예수님이 당시 왜 죄인,창녀,세리들과 늘 함께 있었는가를 생각해보세요. 왜 예수님이 당시 가장 휼륭한 인격자들을 피해다니시고 결국 그들에게 죽임당하셨는가를 생각해보세요. 왜 성경은 '가르치는 자의 자리'에 있지 말라고 했는지 잘 생각하셔야합니다. 


 요한의 세례가 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세례가 ‘상징’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세례는 물을 건너가는 것이죠. 즉, 건너가기 전 방향에서 보면 빠져 죽는 것이고, 건너간 후 방향에서 보면 다시 살아서 나오는 것이죠. 이것을 물로 세례를 주면서 ‘상징’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실체적 세례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주체가 되어 이해하여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체가 되어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침노하여 들어오셔서 불과 같이 전부 우리를 죄(인본주의)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입니다. 불은 모든 불순물을 태워 없애고 오직 순금과 같은 것만 남기죠. 그런 불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도 잘 새겨들으셔야합니다. 불이 정금을 단련하듯 우리의 나쁜 죄들을 없애 버리고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 되도록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방향성은 전부 인본주의적 종교관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댓가를 다 치루시고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다 이루셨습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이 되었죠. 왜냐하면 이 세상이 창조된 목적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모두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이죠. 그런 예수님의 사역이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끝맺음을 맺었죠. 그리고 예수님도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죠. 즉, 인간의 기준에 아직 종말이 아닌 것 뿐이지. 하나님의 시간은 더 이상 하실 것이 없는 종말의 알림종이 울린 것입니다. 선택된 자들의 인생은 이것을 알기 위해 잠깐 존재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인본주의 삶과의 분리를 이루어 내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는 자들은 알곡이라고 하고 이 자들은 곳간으로 들인다고 하죠.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천국도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천국은 관계의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가 끊어진 자들 즉,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은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하죠.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아셔야합니다. 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옛자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옛자아를 불로 태우시고 ‘거듭난 나’만을 예수님의 품에 안으신다는 말이기도 하죠.   "선택받지 않은 자들 뿐 아니라 선택받은 나의 옛자아도 지옥에 간다"는 말은 한 두 줄로 설명될 말씀은 아닙니다. 사실 성경은 선택받지 않은 자들의 삶에 관심이 없죠. 오히려 선택받은 자들의 '옛자아'들을 지옥에 보내는 것이 목적이죠. 이것은 성경에서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에도 나와있습니다. 옛자아를 변화시켜서 천국에 보내는 방법은 없습니다. 철저하게 그 옛자아의 죄됨, 무가치함을 인정하여 지옥으로 끊어 냄을 통해 오직 예수님의 품에 있는 거듭난 나에게서만 평강을 얻는 방법 뿐이죠. 사실 이 부분은 어떠한 설명을 한다해도 모자랍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영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어떤 설명을 하더라도 '상징'일 뿐이기 때문이죠. 늘 '눈을 떠서 복음을 더 볼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는 기도만 하세요.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죠. 그 이유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시죠. ‘의’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즉, 이와 같이 하여  예수님의 정체성(복음)을 드러내는 것이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은 표지판이 복음을 가리키는 것을 뜻하죠.

 세상의 모든 창조물은 전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시간적으로 그 마지막 표지판의 역활자인 요한, 그리고 마지막 표지판 사건인 요한의 세례가 끝나자 ‘상징’은 전부 사라지고 ‘실체’이신 예수님이 완벽하게 등장하시는 것이죠. 그 실체의 인정을 하늘에서 하나님이 해주시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까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죠. 하나님과 나는 원수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나는 완벽하게 분리가 되었습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는 모순이 되죠.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죠. 오직 그 분만이 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 분만이 기뻐 받으실 존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품안에서 숨어 있어야 하나님을 뵙게 될 수 있죠. 그 품안에서 예수님이 받은 사랑을 우리도 함께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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