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4:18-25(21.08.13.금)

은혜바라기 2021. 8. 13. 09:05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성경에서 2라는 숫자는 ‘증거, 증인’의 숫자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두 돌판에 새기죠. 일반적으로 한쪽에 5계명 씩 두 개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아닙니다. 10계명을 새긴 돌을 똑 같이 두 개 만드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은 ‘증거’가 되기 위한 계약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계약서는 2개를 만들어서 서로 양쪽에서 보관을 하죠. 

 더불어 또 하나 아셔야 할 것은 10계명의 ‘10’의 뜻은 지켜야할 계명이 10개이므로 10계명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계명을 613가지(유전까지 따지면 2134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10계명이라는 에피소드가 성경에 실린 이유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완벽하다. 혹은 말씀이신 예수님은 온전하다.’라는 '완전함'을 10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10이란 완전수죠. 다시한번 말씀드리면 말씀(예수님)이 완벽(완전, 온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표현하시기 위해 온 율법을 돌판에 10개로 추리신 것 뿐입니다. 다시한번 요약하면 계명이 10개라 10계명이 아니라 계명(말씀)은 완벽하다라는 것을 이야기하시기 위해 10개로 추리신 것 뿐이죠. 결국 10계명이 말하는 주 핵심은 ‘예수님의 온전(완벽)함’입니다. (((더불어 십일조도 만찬가지입니다. 돈 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십일조란 10이라는 완전수의 대표 즉, ‘선택받은 자들의 온전한 대표이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내라는 뜻은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는 것이 완벽한 복음의 계획입니다.’를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의 교회는 ‘월급의 10분의 1을 내라’로 바꾸어 버렸죠.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이렇게 지키도록 한 것은 예수님이 아직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일조 되심'을 몇 천년 동안 그 의미를 훼손하지 않고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이 후에는 더 이상 돈 내라는 십일조는 없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십일조를 없애버렸죠. 그 후 몇 백년이 지나서 교회들이 다시 만들어 낸 것입니다.  ))) 하나님이 손대지 않는 교회는 늘 종교개혁이 필요한 부패한 상태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죠.

 성경에서 2라는 숫자는 늘 증거, 증인을 뜻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를 뽑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두 형제 베드로와 안드레를 한번에 뽑고, 조금 있다가 다시 두 형제 요한과 야고보를 한번에 뽑죠. 이들은 앞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사명이 되게 하신다고 하시죠. 그래서 2의 숫자에 힘을 주고 독자에게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이 둘은 결국 ‘돌판2개’와 같은 의미입니다. 물론 그 돌판에 새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죠. 이들은 돌판이 되어 열심히 거기에 새겨진 말씀인 예수님을 퍼 날라야하는 자들이죠. 한가지 분명히 알셔야할 것은 ‘돌판’은 아무것도 아닌 ‘Nothing’입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첫 제자인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돌’입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베드로와 형제이므로 이 둘이 바로 ‘두 돌판’의 역할로 이 장면에서 등장한 것이죠. 성경의 짜임새를 보면 정말 놀랍지 않나요? 

 이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배를 버려두고,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야 합니다.’라고 가르치게 되면 절대 안됩니다. 4(땅)와 6(인본주의)을 정확히 구분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인생)은 매우 진지하게 대하고, 열심히, 성실하게 다루셔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인간의 기준’인 인본주의로 해석이 되는 것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목표죠. 즉, ‘잘 살기’가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복음을 보는 것, 복음을 듣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물,배,아버지를 버린다’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의 이름은 ‘세베데’입니다. 이 세베데의 뜻은 ‘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즉, 야고보와 요한은 이 세상의 부모가 주는 것으로 살아가던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이 세상이 주는 것(인본주의의 모든 산물 : 재물, 인간관계 등등)을 버리는 장면을 설명하는 것이죠. 정확하게는 이 세상에 묶여 있는 것을 끊어 낸다는 표현이 옳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인본주의라는 죄에서 벗어나 복음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절대 ‘성경을 따라 해서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잘 지켜야한다.’라는 말은 ‘말씀대로 행하여야(do) 구원받는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이 변질되지 않도록 지켜야(keep)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말씀 안에 들어 있는 본질인 복음이 훼손되지 않고 전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지키라는 것을 말씀대로 행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우리가 행하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말씀을 변질시켜버립니다. 그 이유는 말씀은 인간이 100%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면 ‘누룩’을 섞어야 합니다. 즉, 60%정도 지켜내는 모양을 보이고 나머지 40%를 누룩(자기 합리화, 망각, 비교 우위 등등)으로 포장하여 100%를 만들어 내죠. 그렇게 되면 말씀이 왜곡됩니다. 그러면 그 안의 복음은 더욱 더 멀어지죠. 그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죠? 그럼 말씀을 행하지 말란 말인가? 아뇨 말씀은 철저하게 행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을 수가 있죠. 그런데 이렇게 철저하게 행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죠. 우리는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지금까지의 신앙관과 방향성이 전혀 다르죠? 만약 이것이 이해가 되시고 진심으로 믿어지신다면 그것이 바로 '눈을 뜨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복음의 속성에 관하여 계속 비유로 이야기 합니다.  일단 복음은 오직 예수님이 가르치고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아닌데~~!! 목사님들의 입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인데~~ 라고 할 수 있죠. 절대 아닙니다. 보통은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스피커로써 사명을 주시고 목사는 그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으로 많이 이해를 하죠.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눈으로 보면 ‘매우 부족한 이해’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힘드니 예를 들어 볼께요. 아무리 휼륭한 목사가 설교를 하더라도 ‘쓰레기’일 수가 있고 이단 중에 이단인 자가 설교를 하더라도 그 안에서 복음이 들릴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날아가는 참새의 짹짹을 통해서도 복음이 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진짜 복음의 귀가 열린 자라면 이것을 이해하실 수가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힘든 이유는 이 부분(복음을 듣고 가르치는 것)은 ‘계시’에 해당하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부분만 듣고,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병에 걸린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자를 고치는 사역’ 은 바로 인본주의라는 병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사역을 가리키죠. 특히 귀신 들린 것은 ‘두뇌, 마음’과 같은 눈에 안 보이는 정신 같은 것이 온통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아이돌'이 되어 세상이 우러러 보는 스타가 되는 꿈만 꾸는 것. 요즘의 세태가 그러하죠. 이런 현상을 성경은 '귀신들린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만약 BTS에게 가서 '너 귀신들린 것이야'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들의 팬들에게 돌 맞아 죽겠죠? 맞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절대 이 세상의 설득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간질하는자, 중풍병자’는 자신의 뜻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자들이죠. 선택받은 자들은 원래 천국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지음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인본주의 세상 묶여 자신의 자유를 인본주의라는 죄에 억압당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전히 교회들은 병을 고친다고 안수하고 금식하는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 주죠. 복음과는 완벽하게 반대 방향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계속 경고하시죠.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병과 귀신을 쫓아낸다고 자식을 두들겨 패는 뉴스'를 보면서 '저런 미친놈들'이라는 표현을 하죠. 하나님이 이런 장면을 뉴스를 통해 보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모습'을 객관화 시켜서 보여주는 것 뿐입니다. '병이 걸리셨나요?'그렇다면 '구름 기둥'을 움직여서 또 다른 환경으로 이동한 것 뿐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환경 즉, '병인 든 환경'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복음'을 이번에는 어떻게 설명하시는지 기다리고(기대하며)있으면 되는 것이죠. 이것은 돈을 벌던, 아파트 가격이 뛰던, 폭락하던, 실직을 하던, 승진을 하던 아무 상관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광야같은 삶에서 단지 하나님께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무대 배경'만 바꾼 것입니다. 즉, 1막 1장에서 2막 1장으로 '복음의 연출(설명)'이 옮겨간 것 뿐입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이 말씀도 잘 생각하셔야합니다. 일단 이 때 예수님을 따른 자들은 실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이 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기적이 '나를 잘 살게 하겠구나'라고 생각하여 따란 간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은 지금 성경을 읽는, 선택받은 독자에게 복음을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이렇게 예수님이 인본주의라는 병에서 너희를 구원하게 되면 너희는 예수님을 따라서 천국에 가게 된다.’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중 구조의 표지판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저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쉬지말고 하셔야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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