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5:13-16(21.08.19.목)

은혜바라기 2021. 8. 19. 09:1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복음의 방향성을 잃지 마세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주신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전부 다 하시고 우리가 행하지 못한 댓가도 다 짊어 지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방향성을 유지한 채 묵상하셔야 합니다.( 제발~~~~~ )  우리의 옛자아는 틈이 나는 대로 말씀을 우리의 기준으로 끌고 와서 해석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과 끊임없는 싸움을 하셔야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눈을 가지셔야합니다. 이 복음의 안경을 절대 벗지 마시고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내가 세상의 소금이므로 세상을 위해 헌신하자.’로 해석하여 이 부분에 묶여 잇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원래 우리는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한 대로 그 결과는 ‘밟히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밟히는 것’이란 인본주의에서의 박해를 의미하죠. 우리가 못한 이 소금의 역할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며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못해서 받을 댓가까지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못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밟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소금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신 것이죠. 

 

 구약에도 이 소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썩지 않게 하는 물질이기 때문에 늘 제사에 사용되죠. 그것 자체가 복음의 속성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에서 롯의 아내가 뒤쪽에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돌아봄으로 말미암아 소금기둥으로 변하죠. 대부분의 교회가 이 부분을 '한번 용서받은 죄는 다시는 돌아보지 말아라 다시 죄를 짓게 되면 롯의 아내와 같이 죽는다.'라고 설교합니다.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이 말씀에 묶여 있다면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도덕책'이 되고 말죠. 복음의 눈으로 보는 이 말씀의 요지는 ' 우리가 롯의 아내라는 것입니다. ' 즉, 우리는 인본주의라는 죄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늘 뒤돌아보고 다시 돌아가려하죠. 그러나 우리가 다시 우리의 죄(인본주의)로 돌아가려할 때 소금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덮어서(죽여서)라도 우리를 인본주의(죄)에서 분리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소금기둥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라는 예복을 입은 자만이 참석이 가능한 결혼잔치 에피소드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이 말씀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빛인 것을 맞지만 전혀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한 죄인일 뿐이죠. 그래서 완벽한 빛인 예수님이 오신 것이며 완벽하게 그 빛의 역할을 하신 것이죠. 인본주의 종교와 복음의 차이가 이렇게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라’ 와 ‘우리가 하지 못한 빛과 소금의 역할로 오신 예수님을 믿어라(정확하게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믿게 되는)’의 차이죠.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여기서 ‘말’이란 한 말 두 말 할 때의 말입니다. 즉, 네모난 상자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안에 등불을 넣고 덮어두는 자는 없죠. 그런데 바로 이런 모양이 바로 ‘우리(나)’입니다. 어두움에 감추어진 빛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뜻하죠. 그러나 진짜 빛이라면 모든 자가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야되죠. 바로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 분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역사에 등장하셔서 전 역사가 지켜보고 이어나갈 수 있도록 찬란하게 십자가에서 등불을 밝히셨죠. 즉, 이부분도 우리가 하지 못하고 있는 바를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 촛점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말씀이 인본주의 종교에서 가장 설교에 많이 사용되는 부분이죠. 교회 밖에서 착한 행실을 하게 되면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이 '와~~ 저 사람의 착한 행실을 보니 예수님이 계신 것이 확실해~~' 라는 말을 듣도록 살라고 하죠.  혹은 이 말씀을 반대로 이용해서 나쁜 행실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에구~~ 저 사람을 보니 예수님을 누가 믿겠어'라는 말은 듣고 살지 말라고 설교하죠. 특히 교회에 덕이 안된다는 말을 많이 하죠. 그러나 이말은 전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착한 행실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여기서 말한 착한 행실은 착할 선 즉 ‘의’를 말합니다. 로마서3장10절을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죠. 인본주의 종교인들의 말은 정확히 이 말씀과 대치되어 성경을 모순으로 이끌고 나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의)’ 즉, 착한 행실이란 정확하게 ‘예수님의 복음’을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착한 행실이라는 것이 우리가 '남의 지갑을 주워서 돌려주는 것'등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행실'만을 착한 행실로 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행실은 오직 복음을 위한 것이죠. 오직 복음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이행하셨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착한 행실'입니다. 이것을 자꾸 '인간본위의기준'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 오직 예수님의 복음으로만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할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완벽하게 인본주의 종교와 참 기독교는 전혀 다른 종교가 되죠? 로마서 3장 11-12절을 조금 더 볼까요? ‘ (의를)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착한 행실)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이 말씀에 부연설명은 필요 없죠? 사실 복음은 쉽습니다. 그런데 자기 기준, 즉,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기준(죄)이 복음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죠. 오늘 말씀의 서론에 이야기한 것 같이 말씀을 자기 기준으로 혹은 사람의 기준으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죠. 

 

 아직도 자기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 이 자들이 말씀을 보는 방향성은 ' 앞으로 좀 더 말씀대로 착하게 살자 그래서 내 착한 행실을 다른 사람이 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자, 교회를 부흥시키자'로 귀결됩니다. 복음과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첫 마디가 바로 '복이 있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즉, 인본주의의 모든 가치를 상실한 자를 뜻하죠. 즉, 내가 무엇을 해도 그것이 가치가 없다는 , 혹은 인간이 그 무엇을 해도 그것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자를 뜻하고 그것부터 출발을 해야 비로서 복음의 눈으로 말씀이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서 내가 아닌 다른 분(예수님)의 가치가 보이고, 그 분이 하신 일로 인하여 위로 받게 되죠. 이렇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 고백이 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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