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5:27-28(21.08.24.화)

은혜바라기 2021. 8. 24. 09:05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어제 우리가 묵상한 ‘살인하지말라’가 우리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른 말씀이라는 것을 아셨죠? 그렇다면 오늘 묵상할 ‘간음하지 말라’도 전혀 다른 말씀이라는 것은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고 말씀을 풀어가죠. ‘간음하지 말라’의 결론은 ‘예수님이라는 신랑을 버리고 인본주의 세상에 묶여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음욕을 품고 여자는 보는 것’도 간음이라고 선언하시죠. 이것을 지켜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라는 묵상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그냥 간과하거나 누룩을 쳐서 설명하거나 이해하죠. 즉,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노력해서 손가락질 받는 간음만 하지 않도록 하면 된다.’에 묶여 있죠. 그리고 목사들도 그 정도 선에서 타협하여 가르치죠. 왜냐하면 그 말씀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삼아 천국에서 살아가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하나님)과 분리되었죠. 이것이 ‘살인’이라고 어제 묵상했죠. 하나님(예수님)과 분리된 인간은 ‘기준’이 하나님으로 부터 ‘나’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자기기준에 의해 살아가게 되죠. 그런데 인간은 점점 많아지죠. 즉, ‘나’가 확장이 됩니다. 그래서 ‘확장된 나’의 기준으로 살아가죠. 이렇게 ‘확장된 나’를 바로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즉, 우리는 신본주의에서 떠나 인본주의로 간음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상황 중 하나는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는 것을 목격한 것이죠. 이 때 사람은 불같은 질투를 느끼게 됩니다. 이 불은 나의 마음을 전부 태울 정도로 강력하죠. 그런데 이런 질투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이유 때문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특별한 이유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인본주의에서 ‘잘살기’에 묶여 있을 때 나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설명하시는 부분이 나오죠.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이왕 '성'에 대한 묵상을 한 김에 조금 다른 방향으로도 묵상해보죠.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성욕도 하나님이 그 무엇인가를 설명하시기 위해 창조하신 창조물입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가 이성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입니다.(아닌데~~ 난 큰 집을 갖는 것이 더 좋던데~~ 이런 마음은 사랑을 받지 못한 결핍에서 오는 다른 채움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감정을 극대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성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행위로 이루어질 때 사랑의 감정은 더욱 극대화되죠. 그런데 이런 성욕은 매우 복음적인 설명이 들어가 있는 하나님의 창조물(창조감정)입니다. 

 ‘성욕’은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희생하며 노력하게 만드는 기초(본능)가 되기도 하죠. 이것은 신랑되신 예수님이 여자로 상징되는 교회를 위해 희생하시는 부분을 가리키는 표지판의 역활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합방을 하게 되면 느끼는 ‘황홀경’은 이루 말할 것도 없이 좋죠. 그런데 이 부분이 바로 예수님과 그 지체된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설명하는 표지판이 되죠.  

 때로는 교회 교사들이 ‘성욕’에 대하여 가르칠 때 이것을 왜곡되게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즉, 가능한 참아라, 회피하라, 혹은 더러운 것이다. 등등으로 잘 못 가르치죠.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즉, 성욕의 행위가 인본주의에서 ‘휼륭한 사람'이 되지 못하지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히려 복음적으로는 이렇게 인본주의 교훈에 묶여 있는 것이 바로 ‘간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단순히 '아무에게나 갖는 성욕’에 치중해서는 안되죠. 정확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국한한 성욕’이 되어야되죠. 그래야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된 교회’라는 복음의 메시지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성욕에 대한 것을 가르치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욕이 매우 성스러운 것이라는 것, 매우 즐거운 것이라는 것 그리고 마음에서 생겨나는 성욕은 '감사합니다.’라는 은혜로 바라보라는 것을 가르쳐야합니다. 그 후 그 ‘성욕’을 주신 이유에 대하여 복음적으로 설명을 해 주어야하죠. 조금 직설적으로 설명하면 '성욕이 들 때 마다 이것은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주신 감정의 표지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죠.  성욕은 예수님과 선택받은 자의 관계가 서로 하나될 때 '얼마나 좋은가'를 설명하기 위해 주신 메카니즘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합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하고 즐거운 ‘성생활’은 바로 ‘오직 사랑하는 한 사람과 매우 진지하고 즐겁고 회피하지 않고 노력하는 성생활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되죠. 남자가(혹은 여자가) 인본주의 세상에서 ’잘살기‘를 선택하면서 돈을 더 잘 벌기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아내와의 성생활이 부실해지게 되면서 결국 부부생활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매말라갑니다. 결국 '의리'로 살아가게 되죠. 물론 '의리'라는 '형제애'도 하나님의 창조물적 감정이므로 이것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메카니즘이 있죠. 오늘 묵상의 촛점은 이러한 하나님이 주신 창조물적인 감정들은 복음을 설명하는데 매우 강력한 요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창조된 만큼 그 감정(성욕, 질투, 의리....)을 터부시 여기지 마시고 매우 잘 가꾸어 나가면서 그 본질을 들여다 보면 모두 은혜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성욕’을 나쁘게 바라보는 이유는 바로 ‘인본주의의 가르침’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성욕’은 ‘모성애’만큼이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하나님의 경건한 창조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부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 ‘성욕’이라는 매커니즘을 자식을 돌보는 노력 만큼이나 부부생활에 적용하면서 사셔야합니다. 왜냐하면 둘 다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하나님의 창조물로써 똑같은 위치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님이 만든 본능적 욕구는 그것을 잘 가꾸지 못하고 남용하거나 오용되거나 버려질 때 그에 해당하는 반대급부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반대급부적 부작용을 만들어 놓으신 이유는 이 본능적 욕구를 잘 지켜내고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죠. 그래야 그것을 통해 복음이 계속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욕이라는 욕구도 음식을 통해 생명을 이어가도록 하는 기초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죠.  그것은 양식되시는 예수님(말씀)을 통해서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식욕, 성욕, 모성애 등등 우리의 노력이 아닌 본성에 새겨진 욕구들은 전부 하나님께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메커니즘입니다. 이것을 부인하고 훼손시키면 안됩니다. 이것을 잘 보존하고 활용하여 인생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셔서 복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의할 것은 이 본능에 묶여 있으면 안됩니다. 이것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까지 들여다 볼 수 있어야하죠. 

  성욕을 주셔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기초 메커니즘을 만드시고, 또한 그것이 배반(분리)될 때 느끼는 질투라는 감정의 메카니즘을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은 모두 그 질투의 출발이 되는 '간음'의 행위를 매우 '나쁜 것'으로 보게 되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랑하는 관계 창조 되었고 그것은 정말 너무 '좋은 것'인데, 인간이 인본주의를 선택하는 배반(분리)를 저질렀죠. 그래서 그 참담함(질투)을 하나님께서 느끼고 있을 것을 인간이 알게 되고 그 행위(간음)가 '매우 나쁜 것'으로 인식되면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 올 수 있게 하신 것이죠. 그런데 바리새인은 '난 평생 다른 여자와 잠을 잔 적이 없다.'를 지켜내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으니 난 선민(선택된 민족, 천국 백성)이야'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산 자들이었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 자들에게 '음욕을 품고 지나가는 여자를 보는 것과 간음은 같은 것'이라는 선언을 하면서 이 모든 감정을 주신 메카니즘의 본질을 볼 수 있도록 유도하신 것이죠. 그런데 바리새인은 결국 '아냐~~ 너가 틀렸어. 그러니 넌 십자가에서 죽어~~'라는 결론으로 가죠. 

 

 이렇게 성경과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은 복음의 진영에 있는 자들과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의 차이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인본주의적으로 성실한, 인격적인, 경건해 보이는 사람일 수록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역 내내 '죄인, 창녀, 새리'와 함께 있었던 것이죠.  복음을 볼 수 있도록 늘 기도하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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