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5:29-32(21.08.25.수)

은혜바라기 2021. 8. 25. 09:26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우리는 항상, 매일 ‘나쁜 눈’을 가지고 살죠. 즉, 눈으로 수 많은 죄를 저지릅니다.  죄 된 눈으로 비판(살인)을 하고, 죄 된 눈으로 간음을 저지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눈을 빼어 버리라고 선언하시죠. 그 이유가 만일 이런 눈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 우리는 ‘지옥’에 던져진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안 없이 위협만을 하기 위해 이 말을 하셨을까요? 당연히 아니죠. 이 말은 이미 대안을 가지고 하신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눈을 뽑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손을 찍어 내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그렇게 하셨죠? 바로 십자가에서 이것을 이루셨죠. 

 이 두 구절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궁극적이 요지는 바로 예수님과 하나 되어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야 하는 우리가  죄로 인해서 '사망'에 이르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옛자아를 찍어내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후 오늘 묵상에서 갑자기 ‘이혼증서’라는 단어가 나오죠. 사실 성경은 읽다 보면 매우 뜬금없는 맥락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성경은 ‘복음’을 설명하는데 우리는 인과율에 의거한 인본주의 관점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뜬금없다고 느끼는 것이죠. 그런데 복음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하나됨’의 중요성과 그 반대의 ‘분리의 죄악성'을 설명하시고 있는 것이므로 지금 이 시점에서 ‘이혼’이라는 부부의 분리는 뜬금없는 말이 아니라 매우 적절한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모세의 ‘이혼증서를 줘서 이혼하라'라는 말씀에서는 이혼이라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인본주의적 결정(남자의 이기적인 결정)’에 대한 복음의 해석으로써 사용된 것입니다. 즉, 우리는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하나님께서 복음을 설명하시기 위해 인본주의의 삶을 통해 설명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부분은 설명을 한참 해야 하므로 나중에 묵상 하는 것으로 하죠. 

 아무튼 오늘의 말씀에서 '이혼증서'에 대한 묵상의 초점은 ‘음행한 연고 없이 어떠한 이혼도 안된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즉,  영적 음행이라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면,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즉, 영적 음행에 놓여 있는 우리 모두 하나님(예수님)께 버려짐(분리) 당해졌다는 것이죠. 

 잘 생각하셔야합니다. 이 말씀은 '이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혼을 차용하여 복음을 설명하는 것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이 말을 가지고 ‘거봐~~ 저 사람은 음행의 연고 없이 이혼했으니 지옥갈 거야~’라는 것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매일 아이들을 학대하여 이혼했다고 해보죠. 그러면 이것은 남편이 음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여자가 죄인이 되나요? 이런 식의 초점과 요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녀학대’를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시기로 작정 하셨다면 아마도 ‘자녀를 학대하는 자는 부모와 자녀의 분리를 시도한 것이므로 이혼을 꼭 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설명하는 뜻을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즉, 이 땅에서의 우리의 모든 행위는 전부 다 ‘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차용하셔어 ‘복음’을 설명하시는 것이죠. 이 경계를 넘어야합니다. 이것을 눈을 뜬다고 하고 거듭난다고 하죠. 이 자들을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부르죠. 복음의 진영으로 넘어온 자, 요단강을 건넌 자, 세례를 받은 자, 구원 받은 자 전부 다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완전 감동을 주는 말씀이 뒤를 잇죠. 즉, ‘음행한 여자는 버려진다.’의 말씀 끝에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라고 되어 있죠. 이렇게 음행하여 버려진 여자에게 장가든 자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전부 음행하였죠. 즉, 하나님과 분리되어 인본주의와 음행한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구원하지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와 우리와 결혼(구원)하시죠.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간음한 자’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죄인의 몸’을 입으신 것을 뜻하죠. 음행으로 버려진 여자에게 장가든 자가 된 것이기 때문이죠. 

 이것이 ‘호세야’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호세야(여호수아)는 예수의 다른 발음법이죠. 예수님이 창녀 고멜(나)을 신부로 맞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성경책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즉, 호세야도 고멜과 같은 죄인이 되는 것이죠. 명백한 예수님의 사역(복음)을 설명하죠. 그래서 복음을 다른 말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또한 아담과 하와의 에피소드에서도 나옵니다.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먹고 죄인이 되죠. 그리고 아담에게 줍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냥 먹죠.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복음입니다. 아담은 완벽하게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그 지혜와 의지가 매우 뛰어난 존재죠. 그런데 하나님이 먹지 말라던 선악과를 하와가 주자 ‘어떠한 잔소리도 없이’ 그냥 먹는다???? 말이 안되죠. 아담은 그냥 하와와 같은 죄인의 자리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사랑)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전부 복음으로 바꾸어서 읽어도 됩니다. 만약 여기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 죄를 짓지 않았다면 아담은 영원한 천국에서 "혼자"살았겠죠. 그리고 하와인 여자(교회)는 영원한 지옥에서 버림받은 여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한 장면도 복음을 설명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오늘도 엄청난 복음의 소리를 들으셨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와 같은 자가 되면 안됩니다. 그자와 같이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존경했지만 복음에 눈을 뜬 자가 아닌 자가 되면 안됩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을 ‘밤에 찾아온 자’가 되면 안됩니다. 내가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존경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에 나온다 할찌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1도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오셔서 나의 눈을 뜨게 만들어서 예수님(복음)을 보게 하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매일 매일 말씀을 쌓는 것이 필요하죠.  쌓고 쌓아서 신앙의 탑을 만들려고 하죠. 그러나 그것은 결국 다른 모양의 바벨탑일 뿐입니다. 

 

 복음적인 묵상은 '성령께 받은 복음'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중점입니다. 복음은 매우 간단합니다.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이 나 대신 오셔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죄를 대속하셨고, 모든 율법을 대신 이루심) 그리고 이것을 알게 된 나도 예수님의 지체가 된다."라는 것이 복음의 전부입니다. 성령께 복음을 받은 자들은 묵상을 통해서 다시 복음의 의미를 더 또렷하게 회복하는 것 뿐입니다. 즉, 결론이 늘 같다는 말입니다. 

 

 교회가서 목사님의 설교에 위로 받고 '그렇구나~~ 좀 더 힘내서 앞으로는 잘 살아보자~'의 결론은 그것이 성경말씀이 동기가 된다고 할찌라도 전부 복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인본주의식 위로의 말씀 뿐입니다. 이런식으로 위로를 받고 화이팅을 하는 것은 어떤 종교에도 다 있는 '세미나'일 뿐이죠. 그리고 아주 멋들어진 세미나 한 편을 듣는 것을 성도들은 '은혜받았다'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복음은 이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직 단 하나 '왜 예수님이 나의 신랑인가?"만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것을 제외한 모든 설교는 전부 '이단'입니다. 

 

 오늘의 말씀인 '눈을 빼라' '손을 잘라라' '이혼해라' '이혼한 자에게 장가들지 말라' 등등 이 모든 말씀은 전부 '복음'을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말씀은 전부 다 복음만을 이야기하죠. 이런 말씀으로 창조된 이 세상도 전부 복음만을 설명하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인본주의로 바꾸어서 살기 때문에 인본주의 시스템으로 인식하는 것 뿐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서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보이죠. 이것을 '눈을 뜬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죠. 니고데모와 같은 '이해했어~~'의 수준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죠. 예를 들면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에 대하여 30년을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따낸 자를 니고데모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 앞에 바이든 대통령의 아들이 '짠~~'하고 나타나서 '우리 아빠는 저녁에 잘 때 꼭 양말을 신고 자.'라는 말 한마디가 30년의 논문을 이기죠. 진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선택된 자들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왜 하나님의 아들들인가를 성령께 계속 설명을 듣는 것이죠. 이것은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아무리 휼륭하게 이해하고 적용한다고 해도 그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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