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5:33-37(21.08.26.목)

은혜바라기 2021. 8. 26. 09:26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구약에서 ‘맹세하면 꼭 지켜라’와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맹세하지 말라’는 결과적으로 같은 말씀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맹세하면 꼭 지켜야 하는데 맹세한 것은 결국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것이죠. 그와 같은 맥락으로 우리가 능력없음을 알고 처음부터 맹세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식의 차이일 뿐이죠. 구약이 문제를 던져주고 답(하나님의 은혜만이 답)을 찾아가게 하는 방법이라면 신약은 그 답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답을 직접 가르쳐 주시고 성령께서 그것을 알게 하는 방식이죠. 그런데 인간은 구약에서 던져준 문제(율법)를 인본주의로 풀어내니 오직 그 답의 채점의 결과가 '인간의 열심'에 달린 것 처럼 이해하죠. 이렇게 인본주의에서의 '인간의 열심'은 인생을 바라보는 방향에도, 신앙생활을 바라보는 방향에도 동일하게 적용하죠. 

 

 '인간의 열심'은 오직 '자기 선'일 뿐입니다. 히틀러가 열심히 유대인을 죽인 것도 결국 '그자만의 선'이었죠. 마찬가지 입니다. 모든 인간의 열심은 인본주의 내에서의 선일 뿐이죠. 이것이 나의 최'선' 이라고 자위하며 살아가죠. 이렇게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것을 '(땅=인본주의)지 (묶일) 옥'이라고 합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것에서 분리가 되고 성령께서 인본주의 인생을 가치없는 광야로 만드시면서 복음을 가르치시죠. 그래서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예수님)의 열심'을 알게 하시죠. 그때서야 비로서 '참 믿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전에 교회에서 우리가 부르는 '믿음'은 대부분 '상징적 믿음'일 뿐입니다. 즉, 참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설명서로써의 믿음일 뿐이죠. 

 

 교회에서 어떤 목사가 '새벽에 나와서 믿고 기도하면 지금 문제가 해결됩니다.'라고 했다고 예를 들어 보죠. 이 때 나의 의지로 '믿음'이라고 믿는 감정을 부여해서 기도합니다. 이 때 내 마음 속에 부여한 '믿음'이 바로 상징체로써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실체적 믿음(영적 믿음, 참믿음)을 설명하는 설명서로써의 믿음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 아니 무교인들, 아니 과학자들도 전부 가지고 있죠. 이유는 이것은 이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서를 들고 '참믿음'을 찾아 가도록 하셨죠. 묵상이 조금 샛 길로 빠졌네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죠. 

 우리는 어떠한 능력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무가치함을 인정해야합니다. 우리는 예배에 가서 하나님께 돈을 드리고, 봉사를 드리고, 마음을 드릴 수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면서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이것은 완벽하게 인본주의 종교에 갖혀 있는 눈 먼 장님과 같은 행위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예수님만 받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은 예수님만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선언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그냥 그런 예수님의 안쪽 주머니에 담겨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존재일 뿐이죠. 내가 할 일은 그냥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나의 무가치함' 혹은 '인생의 무가치함' 혹은 '인본주의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오직 유일한 가치인 예수님의 품으로 딸려 들어가는 것 뿐입니다. 맹세는 이런 나의 무가치함(무능력함)을 부인하고 '능력있음'으로 착각해서 하는 말이죠. 

 구약에서 우리가 잘 아는 비슷한 말씀을 한 번 보죠. ‘잠언22:26하 : 남의 빛에 보증를 서지 말라’ 성경은 전반적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가르치죠. 그런데 남의 빛 보증을 서지 말라고 하시죠. 이게 무슨 모순되는 말일가요? 복음의 눈으로 보면 두 말씀 모두 복음을 설명하는 말씀인데, 인본주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다보니 모순되게 들리는 것이죠. 

 네 이웃과 네 몸의 관계는 바로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뜻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나를 사랑(복음)하신다는 말입니다. 절대로 우리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죠. 오직 예수님만이 이웃인 나를 본인의 몸과 같이 사랑하시죠.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의미입니다. 즉, 절대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내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보증을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너의 빛(죄)을 내가 보증 설께(책임질께)’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죄(빛)의 보증은 예수님만이 책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눈으로 보게 되면 인본주의에서 대치되는 두 말씀이 하나로 들리죠? 신기하죠? 

 다시 한번 반복하면 맹세는 우리의 능력되지 않음을 능력이 있다고 착각해서 나오는 모든 행위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는 자기의 능력없음을 능력있음으로 착각해서 말할 때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대변할 외부의 그 무엇을 가져다가 ‘자기의 능력=외부의 능력’으로 동일시하여 착각하여 말하곤 하죠. 그것이 그 다음 말씀에서 나오는 부분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라고 하시죠. 즉, 하나님의 능력을 너의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능력없음’에 대한 확고한 말씀이 그 다음 구절에서 계속 나오죠.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고 하시죠.  정확하게 ‘능력없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장 착각하는 부분이죠. 우리는 무가치함(무능력함)을 가치(능력)라고 바꾸어 놓고 그것에 열광하는 이상한 존재들입니다. 

 피켜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를 모두 아시죠? 이 선수가 평생 한 노력은 그냥 ‘얼음 위에서 빙빙 도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경기에서 가장 멋지게 도는 자가 된 것이죠. 그리고 세상은 김연아 선수를 인본주의 세상의 꼭대기 즈음에 올려 놓았죠. 그리고 수 많은 자들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지금도 '얼음 위를 빙빙도는 노력'을 하죠. 인본주의 내에서는 무척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의도로 본다면 이것은 그냥 ‘먼지’와 같은 아무 의미없는 행위일 뿐입니다. 김연아 선수보다 더 열심히 한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즉, 1살때부터 죽기 직전인 80살까지 24시간 전부 '얼음위에서 빙빙 도는 것'만 하고 죽는다고 해보세요. 가치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런데 선택받은 자는 이런 김연아 선수를 보면서 그 ‘무가치함’을 보게 되고 인본주의에 묶여있는 자들은 이런 김연아 선수를 찬양하죠.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면서 보죠. 심지어는 설교 단상에서 이것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김연아 선수를 폄하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인본주의 시스템이 그렇다는 말이죠. 전부 다 바벨탑 시스템을 가지고 있죠. 우리 모두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죠.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무능력함에 대한 복음의 기준을 설명하고 계시죠. 복음의 진영에 있는 자들은 오직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라고 하라고 하시죠. 그리고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이에서 지나는 것'이란 '옳다'에서 멈추지 않고 옳기 때문에 '(열심히) 하자'로 진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미 하신 것)을 아셔야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이렇게 질문하죠 "그럼 우리는 뭐하라고?" 이 질문에 다시 묶여 버립니다. 그래서 복음은 설명과 설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라는 말씀은 복음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과 능력으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떠한 상황이 우리에게 복음이 주어질 경우 우리는 이 상황이 ‘복음으로 보인다’ 혹은 ‘복음으로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생의 목적은 성령께서 주시는  '복음의 발견'에 있다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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