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구약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의 진정한 요지는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100% 이상으로 갚는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인본주의와 인과론으로 해석하는 것과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큰 차이를 보이죠? 이 부분은 조금 설명이 필요하지만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나오는 말씀들이 이 말씀과 동일한 본질을 담은 내용이므로 오늘의 묵상을 통해 저절로 해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하시죠. 이 말씀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즉, 오른편 뺨을 빼린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인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왼편을 돌려 되신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내주는 것을 뜻하죠. 성경의 실행자가 되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은혜의 대상자일 뿐입니다. 오직 말씀의 실행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묵상해 보죠.
하나님에 의해 천지창조된 이 세상과 역사는 모두 상징입니다. 상징이라는 뜻은 그 실체가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죠. 그 실체는 모두 예수님과 관련된 것 뿐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죠. 즉, 복음이 실체이며 이 세상은 그 실체를 설명하는 상징이라는 것이죠. 이 두가지를 정확히 이해하셔야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 조차도 상징(비유)과 실체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스님께서도 성경 읽고 매우 잘 해석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질인 복음 즉, 실체는 숨겨져 있죠. 이 부분을 가르쳐주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 뿐입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말씀을 대하는 상황은 누구나 비슷합니다. 즉, ‘살인하지말라’라는 말씀을 대하면 ‘도덕적 교훈적 법적 상황 즉, 인본주의적 상황에서의 받아드림’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성령께서 그 안의 실체인 복음을 알려주시죠. 즉, '예수님을 살인하지말라' 즉, '예수님을 나와 분리하지 말라' 입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돌려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후 나오는 말씀인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을 주는 것’ ‘오리는 가자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하는 것’ 전부 다 같은 말씀이죠. 이것을 종합하여 알려 주신 말씀이 바로 그 다음 구절인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전부 복음을 가리키는 표지판일 뿐이죠. 결코 도덕적, 인격적 성숙 (흔히 말하는 성화를 이루는 연습)이 아닙니다.
이 말씀들은 사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죠. 그리고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께 원수죠. 우리가 예수님의 뺨을 때리죠. 우리가 예수님의 옷을 뺏죠. 우리가 예수님을 강제로 오리를 가게 하는 자죠. 예수님의 옷을 뺏는 장면은 십자가 처형식에서 로마군사들의 행위로 다시 표현되죠. 그리고 5리라는 것은 당시 로마인이 식민지 사람들에게 시킬 수 있는 노동권리였습니다. 즉, 5리라는 것은 박해를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박해를 가하는 자들이 바로 ‘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나에게 복음을 알려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죠. 이것이 바로 오늘의 말씀의 요지입니다.
‘이 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하죠. 이렇게 예수님만이 박해를 받고도 복음을 전해주는 사명을 다 하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게 된 선택된 자들은 (공짜로) 예수님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로 칭함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만큼의 노력을 해야만 하나님의 아들(천국)이 되어야한다면 이것은 복음(복된 소식)이 아니라 힘든 소식입니다. 어려운 소식이죠. 불가능한 소식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이 말씀은 복음이 담겨진 이 세상을 선택된 자들이나 유기된 자들이나 전부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어떤 자는 성경으로, 어떤 자는 자연으로, 어떤 자는 역사를 통해 등등 모두 하나님의 가리키심(복음을 가리키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중 예수님의 신부가 될 자들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특히 주의하셔야할 점은 '하나님이 손을 누구에게나 내미는데 이것을 잡는가? 안잡는가?는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라는 알미니안주의를 조심하셔야합니다. 감리교의 교리죠. 장로교의 교리인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복음의 속성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 불가항력적이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죠.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즉, 원수도 사랑해야한다는 것이죠. 이 말씀도 우리의 인격적 성숙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은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랑한 자만 사랑하셨다면 어떤 자도 구원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박해한 자, 십자가에 못 박은 자, 자신을 배신한 자 등등 모두를 사랑했기에 그들을 구원하실 수가 있었던 것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죠.
그러나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모든 인간'를 지칭하는 것 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이라는 범위'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죠. 그 범위에 들어 있는 자들 조차도 100% 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략해서 설명을 풀어 나가신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부분을 생략해서 설명하셨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오직 선택받은 자만 '성경의 독자'라고 인식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 성경을 재미로 읽던, 종교 생활을 하던, 인격 성숙과 교양을 위해 읽던 하나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것은 매우 무서운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신경 쓰지 않음'은 '전혀 복음과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말죠. 그래서 성경에서 '동성애'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동성애'란 흔히 말하는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죄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전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즉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구원의 촛점으로 설명하기 위해 창조 된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동성애'는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구조죠. 이 구조는 절대 복음을 설명할 수 없는, 즉 복음의 범위 밖으로 나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유기된 자(버림받은 자)' 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결국 '동성애'는 우리가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차용해서 사용하신 것 뿐입니다. 그 본질은 '복음을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교회에서 복음은 설명하지 않고 오직 인본주의 교훈과 위로만 설교하다가 끝나고 성도들은 그 교훈에 은혜와 위로를 받았다고 눈물 흘리면서 끝났다고 가정한다면 그 상황이 바로 '동성애'의 상황과 본질적으로 같은 상황입니다. 매우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동성애'를 한다 해도 그것이 구원을 받는지! 못 받는지! 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들도 얼마든지 살면서 '동성애'와 같은 '복음과 상관없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를 하면서 괴로워 하고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자들은 '교회에서 평생 고고한 척하는 왠만한 목사와 장로 보다 훨씬 더 괜찮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죠. ' 우리는 전부 '죄인'이라는 인식없이 절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조금 샛길로 빠졌네요 다시 본문을 묵상하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좋아하는 자들만 사랑하죠. 혹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목적이 동반되는 경우입니다. 즉, 재물을 받기 위해서 사랑하는 척, 혹은 명예를 위해 사랑하는 척, 혹은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 사랑하는 척하죠. 자신을 박해하고 죽이는 자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절대 절대 업습니다. 오직 예수님 뿐이죠. 그런데 이것을 믿게 되면 그런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 구원을 받게 되죠.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기독교에서 '성화'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이 후의 인생을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게 되기 위해 노력해서 성화를 이루어라.'라고 가르치죠. 그런데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길로 다시 들어서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온전한 성화'란 바로 '우리는 절대 성화를 1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유일하게 온전하신 예수님의 안쪽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라'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한 성도'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 비유에서 나온 하늘잔치에서 '예복(예수님)'를 입지 않은 자가 쫓겨나는 장면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죠.
그래서 선택된 자가 복음을 깨닫게 되면 성경의 단어 하나 하나의 뜻이 전부 바뀌어 버립니다. 그 전에는 인본주의 사전에 입각한 해석을 했다면 이제는 복음의 진영에서만 사용하는 사전을 사용하게 되죠. 완전히 다른 책이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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