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6:1-4(21.08.30.월)

은혜바라기 2021. 8. 30. 08:4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직전 묵상의 말씀이 ‘온전하라’였습니다. 우리는 절대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유일하게 온전하신 예수님의 주머니 속에 숨는 것이 ‘온전하라’라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온전하기 위하여 자기 의를 행하려 노력하죠.

 현실의 부모가 자식에게 ‘나가 죽어라!’라고 할 때 자녀가 ‘나는 말 잘 듣는 자녀가 되야쥐~’라고 생각하면서 정말 집 밖으로 나가서 죽어 버린다면 이것은 정말 말이 안되는 것임을 잘 알 것 입니다. ‘나의 행동이 부모님의 마음을 그 정도로 아프게 했구나~~’라고 생각하여 더욱 더 부모님의 곁에서 딸랑 딸랑 거리는 자녀가 되는 것이 옳은 방향이겠죠. (조금 억지스러운 비유이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마찬가지로 인간이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 자기 의를 행하여 이루려는 것은 모두 바벨탑입니다. 오늘의 말씀에도 이런 의는 결코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한다고 나오죠. 이런 의는 무가치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도 이 과정을 겪죠. 즉, 온전한 삶을 위해 자기의 의를 위해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런 자기 의가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죠. 즉, 이것은 진짜 의가 아니라 오직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의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예수님께 온전하게 의지하는 과정을 겪죠. 이것을 비유로 설명한 부분이 바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 반성하고 부모님(하나님)께 돌아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물론 그 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러나 그 에피소드 자체가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표지판이라는 것이죠. 즉, '자기 의'로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것을 '탕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비참한 상태를 경험하게 되죠. 그래서 예수님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관여한 부분이 안나오는데 어떻게 예수님인가?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데 성경 말씀에서 보면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씀이 매우 중요한 단서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돌이킬(회개, 거듭남)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 갈 수 있는 자,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즉,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된 것은 '나'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은 바로 '예수님과 하나 된 나'가 된 것이죠. 즉, 예수님의 지체가 된 것이죠. 예수님의 예복을 입은 것이 된 것입니다. (첨언하면,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첫째 형은 바로 '율법'이 되겠죠. 왜냐하면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공로없이 죄 용서 받는 '나'가 못마땅한 것이죠. )

  ‘구제할 때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받으려는 것’으로 표현된 부분이 나오는데 이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나옵니다. ‘자기 상’이란 ‘자기 만족’입니다. 결국 돈을 벌어서 자기만족을 하는 것과 똑 같다는 말이죠. 인본주의에서는 ‘구제는 남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진짜 의’로 착각을 하는 것 뿐이죠. 

 그러나 진짜 구제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은밀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윗집에 떡을 가져다 줄 때 아랫집은 모르게 하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오른손과 왼손이 서로 모르게 할 정도의 은밀한 의를 말합니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의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 말씀은 매우 복잡한 복음의 정수가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잘 따라오세요. 

 오직 ‘의’란 예수님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의’죠. 즉,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즉, ‘구제할 때’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불쌍하게 여기는 자를 구원할 때’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제’는 상징이며 그 실체인 ‘구원’을 설명하는 표지판인 것이죠. 그 때에 ‘오른손’은 ‘선택받은 자를 구원하는 일’을 ‘왼손’은 ‘버림받은 자가 모르게 할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매우 은밀하게 하신다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역순으로 풀면 복음은 버림받은 자가 바로 옆에 있어도 그 자는 복음을 절대 알아 듣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그 옆에 있는 선택받은 자들만 복음을 알아 듣고 구원받게 하겠다는 것이죠. 남 몰래하는 구제가 더 수준 높은 행위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인본주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영역입니다. 즉, 내가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사람들은 절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시기가 바로 2000년 전 '바리새인의 시대'였죠. 왜 예수님이 그 당시에 오셨는지를 자명하게 생각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전 역사 속에서 그 시대를 꼭 찝어서 오신 이유 조차도 모두 철저하게 복음으로 계산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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