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땅’은 당연히 인본주의를 뜻합니다. 이 땅에 가치(보물)를 쌓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쌓는 가치는 전부 다 없어질 가치라는 뜻이죠. 그러나 인간은 항상 자신의 가치를 땅에 쌓고 살죠. 그러나 예수님만 유일하게 보물(가치)을 하늘에 쌓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보물은 바로 교회입니다. 즉, 선택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보물(예수님의 신부=교회)를 이 땅에서 분리시켜 하늘에 쌓죠. 이것을 ‘천국을 만드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4장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사역을 앞두고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죠. 이 말씀을 ‘우리를 위해 천국이라는 장소를 만들러 간다’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선택받은 자들을 이제부터 완벽하게 십자가로 모으겠다’라는 뜻입니다. 즉,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닌 예수님과 선택받은 자와의 관계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이마저도 ‘시간’이라는 개념을 없앤다면 이미 천국이라는 ‘예수님과 선택받은 자들의 관계’는 완성되어 있는 것이죠.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헌금을 교회에 잘 내야 그 곳에 내 마음이 있다’라고 가르치는 교회가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수준을 어떻게 이렇게 까지 끌어 내리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그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라는 격언이기도 하지만 이 격언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죠. 즉, 인간은 오직 인본주의 안에 보물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곳에 묶여 있는 죄인이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그 분의 보물인 선택받은 자를 인본주의에서 분리시켜 하늘에 올려 놓을 것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선택받은 자들과 항상 같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눈’이라는 뜻은 복음과 인본주의를 가르는 기준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눈먼 자’가 많이 나오고 예수님도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한 것이 바로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죠. 즉, 복음을 알아 듣게 되는 것이 바로 ‘눈을 뜨게 되는 것’이고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것이 바로 ‘눈을 감은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이 나쁘면’이라는 뜻은 바로 ‘인본주의에 묶여 있으면’이라는 뜻이죠. 반대로 ‘눈이 성하면’이라는 뜻은 바로 ‘복음을 알아듣게 되면’이라는 뜻입니다.
즉,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는 뜻은 결국 ‘복음을 알아 듣게 되면 구원을 받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둡다’라는 것은 ‘인본주의에 묶여 있게 되면 심판을 받게 된다’라는 뜻이 되죠.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에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이라는 뜻은 ‘네게 빛(복음,예수님)이 없다면’이라고 해석해도 됩니다. 원래의 의미는 ‘네가 빛이라고 생각했던 그 빛이 진짜 빛이 아니라면’ 이라는 뜻이죠.
그리고 결론적인 말씀이 나오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라는 것은 완벽하게 인본주의와 복음이 서로 공존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인본주의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나의 옛자아입니다. 곧 나의 옛자아와 거듭난 내가 동시에 만족하고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은 이것을 가장 꿈꾸죠. 즉, 예수님을 잘 믿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잘살기'를 바라죠. 이것은 절대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으면서 100평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게 되면 100평 아파트에서 살게 되어도 그 가치가 '광야'와 같이 무가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물론 당연히 그 와중에도 내 속에 있는 나의 옛자아는 그 100평 아파트를 기뻐하고 200평 아파트를 꿈꾸죠. 그러나 이런 나의 옛자아의 본성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고 '나는 예수님이 아니면 정말 안되는구나~~'라는 결론으로 다시 가게 되죠. 사도 바울도 말년에 이런 고백을 하죠.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나는 매우 곤고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사슬을 누가 끊을꼬!!!!(예수님만이 끊을 것임을 암시)' 그런데 바로 이 메카니즘이 하나님이 천지창조하신 이유입니다. 이 땅에서 스스로 죄를 끊고 의(율법)를 지켜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예수님)만을 바라게 하신 것이죠. 오늘의 묵상은 여기 까지 입니다.
복음적인 성경 읽기를 위해 짧은 묵상 한 편만 하죠.
성경에서 나와 이웃에 대한 이야기의 실체는 전부 나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인본주의에서 이것을 나와 옆집사람으로 바꾸어서 해석을 하죠. 물론 옆집 사람으로써의 이웃을 통해서 복음을 알아가도록 하신 의도도 있지만 이것은 표지판으로써의 기능이며 실체적 이웃은 오직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옆집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복음으로 바라보는 옆집사람은 바로 '객관화된 나'입니다.
교회에서 내가 욕하는 집사, 사회에서 내가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 TV에서 내가 욕하는 범죄자들, 정치인들 그 모두는 바로 '객관화된 나'입니다. 즉, 나의 거울이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나는 그들과 전혀 다른 '환경'에 살았기 때문에 그 행위가 표출이 안된 것 뿐이죠. 그러나 나도 그들과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 같은 환경에 처하게 되면 더 큰 나쁜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타인의 '나쁜 행위'를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안에 그 '나쁜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검은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내가 유독 '잘난척하는 집사'를 교만한 집사라고 자꾸 욕하는 상태라면 내 안에 '남보다 잘나고 싶은 교만한 검은 기준'이 많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잘 보이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런 집사의 행위를 '멋지다~~'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죠. 그 사람은 그 안에 '늘 자존감이 없는 자신을 학대는 검은 기준'이 많이 들어 있어서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가지는 동경심일 것입니다.
심리학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을 만드셔서 우리 옆에 두신 이유는 바로 내가 나의 옛자아를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메카니즘이라는 것이죠. 즉, 타인은 '객관화된 나'입니다. 이 메카니즘을 부인하는 것이 바로 '비판'이죠. 비판의 본질은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 입니다. 즉, 저 사람과 나의 분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자주 나오죠. 더 구체적인 말씀이 바로 '남의 눈의 티와 내 눈의 들보(기둥)'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죄된 행위를 나의 죄됨을 이해하고 오직 예수님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시면 됩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