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은 우리가 평생 기도(묵상)해야 할 유일한 기도입니다. 가능한 이것에서 벗어난 기도는 하지 마세요. 솔직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너무 너무 힘든 상황이 닥치면 이것에서 벗어난 기도를 합니다. 그것도 매우 간절하게 말이죠. 그러나 정말 희한 하게도 결국 그런 기도의 끝은 주기도문의 어느 한 줄의 기도로 바뀌면서 끝납니다. 그 기간이 짧을 때도 있지만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조금 이해하시기가 어렵나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던 자신이 꿈꾸던 인본주의 비젼을 가지고 있죠. 어떤 사람은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어서 그것을 늘 기도했다고 해보죠. 그 기도를 아마도 몇 년 몇 십 년을 할 수도 있죠. 그러나 선택받은 자라면 그 꿈을 이루던, 못 이루던 간에 그 꿈의 허상을 깨닫게 되어 결국 ‘주기도문’의 어느 한 줄을 기도하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게 됩니다. 결국 참신자는 예수님이라면 하실 수 밖에 없는 기도로 바꾸어서 하게 되죠.
유명한 한나의 기도를 아시죠? 한나는 아들이 없는 설움 때문에 늘 울면서 아들을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드디어 기도를 들어 주셨죠. 그 기도를 들어준 이유는 이 에피소드 중간에 ‘하나님의 마음과 한나의 마음이 통했다’라는 중요한 구절 때문입니다. 한나는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없음(결핍)에 대한 기도로 시작했지만 하나님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음 >> 예수님을 전할 사람이 없음 >> 성자 예수님을 가리킬 그 무엇도 이 땅에 없음 >> 이 땅에 성자 곧 하나님의 아들(예수님)이 없음 " 즉,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어서 매우 슬프신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한나는 자신의 아들없음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 상태를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죠. 그래서 세상의 결핍으로 시작한 기도이지만 복음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기도로 응답받은 자식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내놓게 되죠. 이제 아시겠죠? 모든 참기도는 결국 주기도문(복음의 영역)에서 끝나게 됩니다. 물론 선택받은 자만 해당됩니다. 즉, 하나님과 마음이 통한 자를 말하죠. 그러나 대부분의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자식 달라고 기도하고 자식을 낳게 되면 감사헌금 드리면서 은혜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죠. 이런 것은 참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냥 불교, 이슬람, 힌두교에서도 전부 다 있는, 사람이 만든 종교일 뿐입니다. 이제 주기도문을 살펴보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여기서 하늘은 천국, 예수님, 선택받은 자들(교회)을 모두 가리킵니다. 기도(주기도문)는 오직 선택받은 자들(하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며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들에게만 아버지가 되셔서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기도문의 이 첫 구절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 그리고 기도를 듣는 분, 그리고 이 둘의 관계를 정확하게 규정짓는 말씀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기도 드리는 자의 목적이라는 것이죠. 더 확장시켜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것이 사람의 인생목적이라는 것이죠. 즉, ‘사람이 사는 이유’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사는 유일한 목적은 창조주인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보통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드린다.’라는 것을 인본주의에서 배운대로 ‘높은 사람에게 손을 비비고 무릎 꿇고 복종하고 무엇인가를 바치는 것’와 같은 의미로 인식할 때가 많죠.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피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즉,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이 아닌 완벽한 사랑의 모든 것이죠. 그 사랑을 바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 만든 천지창조의 모든 계획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 대신 받으신 고난과 죽음 그럼에도 단 한사람도 따르지 못할 것을 아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우리를 예수님의 품 속에 넣고 견인하여 가시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1도 없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은 바로 이 복음(혹은 복음의 계획=사랑의 계획)을 전부 다 알아 듣고 고개를 끄덕 끄덕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사랑(복음)을 우리가 알아 주실 때 바로 ‘영광 받음’으로 인정하시는 것이죠.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나라'는 시간의 개념을 넘어서는 '천국'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어머니가 예수님을 믿는 자식을 두고 먼저 죽게 되어서 눈을 뜨면 그 천국에 아들이 이미 와 있는 개념이죠. 즉, 이미 천국은 만들어져 있습니다. 선택된 자들이 어떻게 천국에 올 수 있는지를 알게 하려고 즉,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이 되었는지를 알게 하려고 하나님은 이 땅 즉,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된 피조를 창조하신 것이죠.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선택이 되어 천국백성이 될 수 있었는지 알려주세요'라는 말이죠. 이것을 조금 더 자세히 풀면 '하나님!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복음(사랑)을 알려 주세요'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말씀이 주기도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죠. 주기도문은 ‘샌드위치’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을 가운데 두고 필요한 주제들로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죠. 이 때 가장 중앙에 위치한 말씀이 바로 ‘일용할 양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사람이 필요한 의식주’로 알고 기도하죠. 많은 목사들의 책임이 큽니다. 일용할 양식은 ‘예수님’입니다. 더 정확하게 설명 드리면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먹고 마셔야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죠. 다시 역순으로 설명하면 우리가 먹고 마셔서 생명을 유지하는 이 메커니즘을 통해서 말씀되신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우리가 진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 때 예수님을 먹고(빵) 마시죠(포도주) 그리고 이것을 늘 기념하라고 하신 것이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가장 오해가 많은 구절입니다. 철수가 영희의 죄를 용서해 줘야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준다는 주고받기(give and take)식 이해로 받아들이시면 안됩니다. 정확하게 이 말씀은 일용할 양식인 예수님을 우리가 먹게 되었으니, 즉 ‘복음의 세상이 우리에게 들어 왔으니’라는 뜻입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원래 율법에 의하면 죄 지은 자는 모두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양식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복음이 이 세상에 들어와서 율법에서 벗어나서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는 환경(세상)이 되었으니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세요’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부분이 주기도문의 마지막이죠. 이 부분은 양식되신 예수님을 먹고 마시고 구원받은 자들의 삶 이후에 대한 부분입니다. 즉, 구원받아서 복음의 진영으로 옳겨진 자들, 곧 거듭나서 새로운 창조물이 된 자들이라도 남은 인생을 자기의 옛자아(인본주의)와 같이 살아야합니다. 이 때 인본주의에 묶이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즉, ‘악’이라고 표현된 부분이 인본주의(옛자아)라면 ‘시험’이라고 표현된 부분이 거듭난 자아의 방향에서 본 인본주의와의 갈등(시험)을 말하죠.
(괄호)부분이 남아 있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성경에서 가끔 나오는 (괄호)는 성경을 정경화(여러 사본 중 성경으로 정한 것) 시킬 때 선택된 성경 사본 중에 생략되어 있는 것도 있고 들어 있는 것도 있을 때 사용한 방식입니다. ‘나라,권세,영광’이 영원히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바로 주기도문의 첫 구절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샌드위치 구조 때문입니다. 즉,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가장 중요한 가운데 ‘일용할 양식’의 의미를 감싸고 있는 구조죠. 즉, 선택된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부분입니다.
주기도문은 사실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를 풀어서 해석하다 보면 이것보다 몇 배의 분량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묵상 정도만 해도 방향성은 충분히 전달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