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6:25-34(21.09.06.월)

은혜바라기 2021. 9. 6. 08: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오늘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분리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사실상 죽은 자입니다. 

 자신의 자녀가 물에 빠져 허우적 되고 있는 상태에서 그 자녀가 어떤 폼으로 허우적 되는지, 어떤 옷을 입고 허우적 되는지, 어떤 품격과 품위를 가지고 허우적 되는지에 관심 갖는 부모는 없겠죠. 오직 그 자녀의 구조에만 관심을 갖게 되겠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방법으로도 자력 구조가 되지 않고 한 사람이 들어가 그 자리를 채워 넣어야만 구조가 되는 장소에 예수님이 들어가 죽으시고 그 자리에 있던 내가 구원받은 것이죠. 

 하물며 우리의 상태는 살기 위해 허우적 되는 상태를 넘어 이미 ‘죽은 자’의 상태입니다.  ‘죽은 자’들이 ‘먹고 마시는 인생’에 절대 포커스를 맞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목숨=영적 구원)에 포커스를 맞추고 인생을 돌아 보라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사람이 인생 동안 쌓아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꼭대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들풀’ 보다 못하다고 하죠.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그 안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외면한 채 인본주의에서 '잘살기'만을 쌓아가면 절대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꽃을 창조하신 이유가 뭘까요? 그냥? 이쁘라고? 복음을 알아 듣는 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 복음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셔야합니다. 그냥 푸르기만 한 풀들에서 피어난 꽃들은 생명을 뜻합니다. 심지어 히브리어로 ‘푸르다’라는 뜻은 ‘텅 빈’이라는 뜻으로도 쓰이죠. 즉,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명이 피어난 것이고 이것을 보면 ‘이쁘다.’라고 느끼죠. 즉, ‘생명은 좋구나’라고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즉, 생명(예수님=복음=말씀)을 계속 우리에게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삭막한 겨울이 지나고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도 봄이 오면 어느덧 꽃들이 만발하죠. 그렇게 만발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생명이 이쁘지? 생명을 생각해봐!, 꽃이 하나 둘 셋 넷. 피어나는 것은 ’생명, 생명, 생명, 생명을 생각해 봐라‘라는 뜻입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님이시죠. 즉, 계속 예수님을 계속 복음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중이죠. 

 오늘의 말씀을 언듯 생각하면 ‘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이 다 준다고 믿는다면 인생을 걱정없이 살겠구나’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 종교에 묶여 있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런 것을 구하는 자들은 ‘이방인’이라고 정확하게 못 밖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란 선택받지 못한 자를 뜻합니다. 

 ‘믿음이 작은 자’라는 뜻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작은 자라고 표현한 이유는 결국 이 후에 선택된 자들은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의 품안에 들어가서 ‘믿음이 있는 자’로 여김 받게 되기 때문에 그 때 와의 구분을 위해서 믿음이 작다고 표현하여 우리가 알기 쉽게 설명한 것 뿐입니다. 실제로의 이 표현은 ‘믿음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전부 다 아셔서 우리에게 그 때 마다 차고 넘치는 의식주를 준다는 것으로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몰라서 안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오직 우리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우리에게 구원에 필요한 환경을 완벽하게 제공(섭리)하고 계신다는 것이죠. 지금 건강이 안좋으신가요? 지금 외롭나요? 지금 돈이 없나요? 지금 승진하셨나요? 지금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셨나요? 어떤 환경이 되었던 그 환경이 지금 나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복음을 잘 설명하실 수 있는 환경을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내가 빈곤함에 처하는 것과 부유함에 처하여 사는 것 아무 곳에서라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한 것입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이 들린다는 것이죠. 즉 어떤 곳에서도 예수님이 보인다는 것이죠.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당연히 ‘의’는 예수님(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바로 ‘구원’ 혹은 '복음'입니다. 즉, '모든 것에서 복음을 알게 하겠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도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그래 하나님께 의만 구하자. 그러면 '잘살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죠. 그래서 성경은 한 구절 한 구절 올바른 해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께 복음을 받았는가? 혹은 성령께서 나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있는가? 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에서 내일은 문법상 ‘주어’입니다. 이 말을 ‘ 힘든일은 내일 염려하자’ 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두라는 것이죠. 이 때 문법상 주어인 ‘내일이’의 실체는 ‘하나님의 섭리’ 입니다. 즉, '모든 염려는 주님께 맞기라'는 것이 올바른 해석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이런 말슴이 나오는 것이죠. 

 

  베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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