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비판의 본질은 나와 타인의 분리에 있습니다. 즉, 비판은 ‘나는 저 사람과 다르게 올바르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므로 타인과 나를 분리시켜 버리는 것이죠. 그런데 타인이란 ‘객관화된 나’입니다. 하나님께서 타인을 창조하여 내 곁에 있게 한 이유의 메카니즘은 내가 나의 본질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을 통해 나의 본질를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죠. 즉, 거울의 역할입니다. 거울인 타인을 보면서 내 안에 그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죠. 그런데 비판은 그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부인하는 것이죠. ‘나 아닌데~~’
하나님의 의도는 내가 못 본 나의 죄 된 본성을 타인을 통해 확인하면서 나의 죄를 발견하게 됨으로 오직 ‘나는 이렇게 죄인이구나. 역시 나는 예수님이 아니면 안되는구나~~’의 길로 들어서기를 바라신 것이죠. 그런데 만약 비판을 통해서 ‘나는 저렇지 않아 저 사람은 옳지않아(이 말은 내가 옳다는 뜻이죠)’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너가 옳다고 생각하니? 그렇다면 네가 생각한 그 옳음으로 내가 너를 심판하겠다’라는 것이죠. 즉, '진짜로 네가 옳은가(의로운가)’를 하나님의 공의로 정확하게 펙트체크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펙트체크는 너무도 깊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 조차도 완벽하게 간음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가 없죠.
그래서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 뒤에 바로 그 유명한 ‘형제 눈에 티, 내 눈에 들보’의 비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즉, 형제의 눈에 티를 확인한 나의 마음에 들보(기둥)같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타인의 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것은 그 죄가 내 마음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교회에서 김집사를 욕심많은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다면 나의 마음에 '욕심'이라는 것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죠. 보통 딸가진 아버지들이 딸들에게 '남자는 다 도둑놈, 늑대' 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그 아버지가 바로 '남자'이기 때문에 그 습성을 너무 잘 알아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비판을 하지 말라'는 말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이 말을 '그래~~ 다른 사람 뒤담화 하지 말자' 정도로 알고 있고 그렇게 가르치죠. 이 말은 '입 밖으로 내 뱉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내 마음 속에 그 사람을 비판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내 마음에 저 사람을 비판하는 마음을 들게 하지 말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불가능하죠. 맞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상태를 깨닫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원하죠.
즉, '내 마음에 저 사람을 비판하는 마음이 들어올 때'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간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깨닫음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지하도록 만들려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의 본질이죠. 결국 전부 복음으로 인도하는 말씀인 것이죠.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렇게 ‘ 내 속에 죄가 없다’, ‘나는 타인과 같은 큰 죄는 없다.’, ‘나는 그 보다는 훨씬 약하다.’ 라고 말하는 모든 자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죠. 그런데 그런 자들에게 ‘자신의 들보를 빼고 이 후 형제의 티를 빼라’고 하시죠. 자신의 들보를 뺄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하시죠. 즉, 우리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들보를 뺄 수 없기 때문에 남을 비판할 수가 없습니다. 즉, 심판을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심판(비판)이 가능한 분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비판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조차 '저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조차 모르오니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세요'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분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으로 품으셨죠. 즉, 마음에 어떠한 티나 들보가 없으신 분이죠.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 예수님만이 비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즉, 자기 눈에 들보가 없는 유일한 자이므로 타인의 티를 뺄 수 있는 자입니다. 즉, 심판의 주관자이시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