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7:6-11(21.09.08.수)

은혜바라기 2021. 9. 8. 09:10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거룩한 것은 복음을 뜻합니다. 개와 돼지는 바로 선택받지 못한 자를 뜻하죠. 즉, 오직 ‘잘살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 오직 인본주의에 묶여 사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 자들에게 복음을 아무리 들려 주더라도 그들은 오직 복음을 비판할 뿐이죠.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결국 이 유명한 구절도 복음의 진영에 있는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가? 의 차이가 해석의 차이를 가지고 올 수 밖에 없죠. 대부분의 인본주의 기독교에 묶여 있는 자들은 ‘더 열심히 기도(신앙생활)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줄 것이다.’로 받아들이죠. 그러나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은 오직 ‘구원’ 혹은 '복음'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 전에 이미 '거룩한 것'이라고 주제를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즉, 해석할 때 이 주제를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이시죠.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치시죠.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찾게 되고, 갖게 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초에 이미 구원을 받은 자, 즉, 선택된 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게 된 것은 '지식을 알게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모든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이 통째로 바뀔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단순히 '앎'으로 표현하지 않고 '믿음'으로 표현을 한 것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도 '앎'보다는 더 정확한 표현이지만 그것도 대단히  부족한 셈이죠.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준다’라는 것도 완전히 반대의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이것을 ‘잘살게’해 달라는데 하나님께서 ‘못살게’ 해 주겠는가? 로 해석을 하지만 복음은 전혀 반대 방향이죠. 즉, ‘구원’을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인본주의에 다시 묶여 버리도록 ‘로또 당첨, 아파트30억 상승, 고속 승진 등등’을 통해 더욱 더 높은 인본주의 꼭대기를 향하도록 만들겠느냐? 라는 뜻입니다. 물론 특정한 상황에서 '아파트 30억 상승'을 통해 복음을 알게 하실 수도 있죠. 즉, 그렇게 바라던 아파트가격이 30억이 상승되어 나의 속 깊은 꿈이 다 이루어진 것 같지만 정확하게 일, 이 년 후 그것이 아무런 '가치없음'을 알게 되게 하여 복음만을 바라도록 하실 수도 있죠. 즉, 어떤 이들은 그 꿈을 꺽어서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시고, 어떤 이들은 그 꿈을 잡게 만든 후 그게 아무것도 아닌것을 알게 만드시죠. 즉, 모든 것은 '복음'을 기준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악한 자는 인본주의 세상의 부모(현실의 부모)를 뜻합니다. 인본주의 세상에서 우리는 부모가 자식에게 좋은 것을 먹이는 것을 경험하죠. 그러나 이것은 상징입니다. 즉, 영적 메카니즘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만들어 놓으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좋은 것을 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 때 좋은 것이란 정확하게 복음, 예수님, 성령님을 뜻합니다. 

 

 ' 현실의 부모와 나의 관계가 단지 상징일 뿐 이라구??? ' 이해는 되는데 완벽하게 설득되지는 않죠? 그래서 '앎'과 '믿음'의 차이를 조금 전에 설명한 것입니다. ' 참 믿음'이란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이해의 확장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이라는 말도 비교적 참 의미와 가까울 뿐 부족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믿음'보다 더 정확한 의미를 몇 개 가져다 쓰죠. 그 중 한가지가 '거듭남' 즉, '다시 태어남' 입니다. 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표현도 쓰죠. 즉, '눈을 뜸' '앎' '믿음' '다시 태어남' 이 모든 말들은 결국 '복음을 진짜로 알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 모든 단어들로도 복음을 가리키기에는 많이 부족하죠.

 

 참 복음을 전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개, 돼지와 같이 버리거나 비판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여 자기 신앙의 성장에 사용하죠. 니고데모와 같은 자입니다. 즉, 예수님을 존경하고 배우려고 찾아 오지만 늘 '밤'에 속한 자 즉,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죠. 그러나 진짜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선 자들은 '다시 태어난 자'들과 같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복음을 바라보죠. 그런데 이 자들의 정말 적은 숫자입니다. 늘 쉬지말고 묵상(기도)하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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