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7:12-14(21.09.09.목)

은혜바라기 2021. 9. 9. 09:0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은 ‘내가 교회 김집사님에게 불고기를 얻어 먹고 싶다면 먼저 내가 대접해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은 모두 구원에 대한 말씀이고 그 주인공은 내가 아닌 예수님이 주인공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나에게 주어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죠. 그래야 우리가 절대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되죠. 즉, 우리가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우리가 죄에 갖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며 그 목적을 이룰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도록 예정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런 메카니즘 속에 들어가게 되는 자들을 선택받은 자라고 하죠. 

 

 그런데 사람도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비법이 있습니다. 말씀에 누룩을 섞는 것입니다. 즉, 누룩을 섞어 말씀의 순도를 낮추고 지킬 수 있을 정도록 (맜있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맛을 내는 누룩)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인본주의에서 대단히 존경받을 만한 모습으로 비쳐지게 됩니다. 이것의 정점을 이룬 자들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택받은 자들에게도 이 누룩을 경고 해야 했죠. 그것이 바로 4대 복음서 다음에 나오는 서신서들입니다. 

 

 사실 4복음서 만으로 완벽하게 복음은 전달이 됩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알게(믿게) 된 자들도 남은 일생을 인본주의와 같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서신서가 성경에 포함되어 있죠. 이 부분에 대한 묵상을 잠깐 하고 넘어가죠. 

 

 4복음서 다음의 첫 책은 배경이 설명된 사도행전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성령의 도구를 말합니다. 이 당시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죠.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주인공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부활, 승천하셔서 이 땅에 없으시죠. 그래서 예수님의 조연 역활을 정해서 성경의 완성을 이끌어 간 것이죠. 그들이 '사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행전은 정확하게 '성령행전'입니다. 즉, 선택된 자들을 찾는 것도, 그들을 이끄는 것도 앞으로는 전부 성령께서 하신다(행전)는 것이죠. 그래서 아이러니 하게도 '사도라는 명칭'으로 특별하게 묶어 버린 이유는 성경이 끝난 후에는 '사도들의 기적'은 없다. 라는 선을 긋기 위함입니다. 

 

 이 후 나온 서신서는 서신서들의 서론격인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는 매우 정확하게 '복음과 누룩'을 설명합니다. 신약에서 가장 쉬운 책입니다. 오직 구원은 행위(누룩)가 아닌 '믿음'이라는 것이 주제죠. 로마서가 가장 쉽다는 것에 동의 안하시는 분들이 많을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책들을 인본주의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즉, 행위의 책으로 보기 때문에 쉬워 보이는 것이죠. 그러나 실제로는 그 안에 들어 있는 복음의 내용을 하나 하나 찾아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쉽지 않죠. 그러나 서신서의 배경인 사도행전을 지나 서신서의 서론인 로마서는 복음을 그대로 직접 설명하시죠. 그래서 쉽습니다. 

 

 이 후 서신서들은 모두 본문격입니다. '복음과 누룩'을 행위의 비유 속에 감춰진 상태로 설명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듯 읽으면 '행위를 말씀대로 잘해라'라고 하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죠. 복음을 설명하면서 그것에 누룩을 섞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상태를 고발합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도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면서 결국 다시 예수님 밖에 승리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죠. 또 다시 결론은 예수님 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이런 모든 것을 겪어야 되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책입니다. 즉, 우리가 겪어야할 고난을 미리 알아서 그 고난의 두려움의 난이도를 낮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즉, 공포 영화를 봐야 하는데 미리 그 줄거리를 알려줌으로 그 공포의 난이도를 낮추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앞으로 이 세상에 닦칠 '재난 영화'에 나옴직스러운 상황으로 보시면 안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선택된 자들의 삶을 다룬 책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인생에서 모두 겪게 하시죠. 물론 그것을 1차대전 2차대전 코로나 등등 과 같이 역사적으로 등장시켜 크게 보이게 하시게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이 인생에서 격는 삶의 계시록을 더 잘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상징'일 뿐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마지막을 계시록과 같은 상태로 끝내실 수도 있죠. 그러나 그 것은 그 것 자체로 '상징 중 가장 마지막 큰 상징'일 뿐입니다. 오직 실체는 선택된 자들의 인생 속에서 만나는 '고난'입니다. 더 정확한 실체적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이죠. 이 부분까지 연결시키면 책 한권 분량이므로 생략합니다. 

 

 그리고 신약이 아닌 구약 전부는 '예수님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모티브입니다. 정리해서 성경의 구성을 살펴 보면 "예수님의 필요성 언급(구약) >>> 예수님의 등장과 복음설명(4복음서) >>> 이 후의 역사는 성령께서 이끔(성령행전)>>> 성령께서 이끄는 삶(복음)과 행위가 이끄는 삶(누룩)의 경고(서신서) >>> 성령께서 이끔에도 남은 인생에서 받을 고난에 대한 위로와 격려(요한계시록) "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완벽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가보죠. 

 

  그래서 오늘의 본문도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다 이루셨는가?'에 촛점을 맟추어 해석을 해야 합니다. 고로 이 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대접을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먼저 사랑이라는 대접을 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인 십자가의 복음을 완성하셨죠.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의 대접을 먼저 받고 나서야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죠(하나님을 사랑한다=하나님의 복음에 고개를 끄떡인다.)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이것도 인생을 살면서 더 가치있고, 더 율법에 어긋나지 않고, 더 높은 수준의 인격과 도덕이 선택길에서 '늘 옳은 길을 선택하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도 오직 예수님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만이 결국 가장 좁은 문인 십자가를 선택하셨죠. 원래 이 길은 죄인인 우리가 선택 해야 할 좁은 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할 수가 없는 좁은 문이죠. 우린 전부 다 심판받는 자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맛있는 빵이 있는데 그 옆에 김집사가 같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그 빵을 안 먹고 김집사에게 주는 좁은 길을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이 정도는 많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좁은 길이죠. 그러나 좁은 길은 매우 상대적입니다. 조금 더 상황을 이어가보면 알게 됩니다. 이 후 김집사가 맛 없다고 빵을 내 얼굴에 던져 버리면 우리는 그 빵을 다시 주워서 '맛 없는 빵을 주게 되서 미안합니다.' 혹은 ' 어떻게 나의 선의를 이렇게 무시할까" 의 두가지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되죠.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죠? 이렇게 좁은 길이란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곳까지 몰고 갑니다 . 이것이 바로 '마음에 품기만 해도 간음' '형재를 미워만 해도 살인' 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이렇게 좁은 길,  좁은 길,  좁은 길을 계속 선택해 나가면 그 최후의 좁은 문이 나오는데 그 가장 최후의 좁은 길은 절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좁은 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지 않게 되면 멸망이라고 하죠. 그래서 우리는 절대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선택에서 오직 좁은 문을 선택하셨죠. 그 최종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좁은 문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신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알게(믿게)되면 우리는 그 좁은 문을 통과했다고 인정되어 거저 은혜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복된 소식 즉, 복음이라고 하죠. 오직 성경은 이것만을 다룹니다. 사실 성경 뿐 아니죠. 온 천하, 역사, 인생 전부 다 이것만을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죠. 이것을 어느 날 알게 되버린 자들을 '눈을 뜨게 된 자' '거듭난 자' 라고 하죠. 

 

 "예수님께서 왜 가장 많은 기적으로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하셨을까?"에 대해 하루종일 묵상해 보시길 원합니다. .........    많은 목사들이 지금도 눈(병 낫게)뜨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우실 때 여러분은 '진정한 묵상'을 하실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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