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거짓 선지자’란 말씀을 가지고 복음으로 전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뜻합니다. 특히 말씀으로 인본주의 종교를 만들어 가르치는 자들이죠. 이 자들은 '노략질’하는 자들이라고 나옵니다. 대놓고 ‘돈,권력,여자’를 취하는 목사들도 요즘은 심심찮게 보죠. 그러나 그것보다 더 은밀한 노략질인 ‘명예, 인기, 이름높임’등의 노략질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은밀한 노략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말씀으로 예수님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부 다 노략질로 판단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TIP : 교회를 선택하실 때 단 한가지만 고려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오직 '설교'로만 판단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최선책은 그 설교자가 ' 복음을 알고 있는가? '입니다. 복음은 알고 있는데 정보가 틀리거나 표현력이 부족하거나 인격이 다소 모자라거나 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마세요. 베드로도 최악의 불안정 인격 소유자였죠. 오직 '복음을 알고 있는가?'에만 치중하세요. 그러나 이러한 목사가 많지 않습니다. 찾다 찾다 절대 찾지 못하는 경우 차선책은 '완벽하게 재미없는 설교자'를 찾으십시오. 즉, 완벽하게 성경을 그대로 읽어 주는 정도의 설교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성경의 해석이 많이 들어가지 않은 설교자를 뜻합니다. 이런 설교는 '무교병'과 같은 설교죠. 즉, 이것의 진짜 참맛을 아는 자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빵이라는 것입니다. 즉, 선택받은 자는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스스로 복음적 해석을 하여 무교병과 같이 자신의 영적 피와 살로 채워 넣을 수가 있다는 것이죠. 복음은 성령께서 직접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
오늘의 말씀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하죠.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이 말씀도 그 사람의 행위 결과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라는 말씀으로 가르치죠. 그러나 완벽한 오해입니다. 열매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 유명한 성령의 9가지 열매에 관하여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어서 ‘휼륭한 기독교인이 되자’라는 방향성을 가진 설교가 바로 ‘인본주의 종교’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열매를 맺기 위해 진지하게 살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그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햐면 9가지 셩령의 열매처럼 살기위해 최선을 다 해 봐야 우리가 그것을 절대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대부분의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바리새인처럼 ‘외식(누룩)’을 섞어서 '내적 타협안'을 내어 놓죠. 그리고 나서 ‘나는 그래도 잘 하고 있다’라는 자기만족의 경계에 묶여 버리죠. 그러나 참 크리스챤이라면, 즉, 선택된 자라면 하나님의 의도대로 ‘나는 결코 그런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존재로구나’라고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이 답이구나’라는 참 결론(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은 '선악과 에피소드'와 똑같은 상황 재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고 그것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 둔 이유는 그것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구나. 나는 피조물이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구나'의 위치를 고수하기 위함인데 사람은 '선악과'를 보고나서 '내가 그것을 먹을 수도 있구나. 그러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나님 같이 되지 않을까?'의 결론으로 가게 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한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복음은 결국 이 때의 '선악과 에피소드'의 상황 재현입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이 선악과였죠. 즉,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죠. 신약은 산상수훈에서 율법의 완성이 바로 선악과였죠. 즉, '마음만 품어도 간음' '형제를 미워해도 살인' '원수를 사랑' 등등이 모두 '선악과'의 역활이죠. 즉,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게 하시려는 의도였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실체로 우리에게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태초에 빛이 예수님이었고, 구약의 선악과 옆에 있던 생명나무가 예수님이었고, 구약에서 율법을 지킬 수 없어 말씀 속에서 찾고 또 찾아 보니 미래에 오실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고 2천년 전 예수님이 현현하신 동안에는 인자 예수님으로 와 계셨고 이후 지금의 시대에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 볼 수 있게 되었죠.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 구약, 2000년천 전, 지금, 미래 등 어떤 곳에서도 항상 존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맺는 것이며 그 열매는 예수님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기 위해 맺은 속성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랑, 인내, 오래참음, 온유. 양선 등등의 속성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볼께요. 매우 중요한 복음의 개념이므로 잘 되새기세요. 우리의 방향으로 본 참 열매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의 주인공인 예수님의 방향으로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 위해 맺은 열매가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되는 것이죠. 즉,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오래참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온유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기쁨(희락)을 가지고 구원하셨죠. 이렇게 성경은 우리의 행위결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죽어 있음’을 인식하고 오직 예수님의 이야기로 알게 되어(믿게 되어)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만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인본주의 종교에서 열매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본주의에서의 선 과 악은 그것을 통해 참 선과 참 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메커니즘입니다. 즉, 원래는 인본주의에서의 악도 악이고, 선도 악입니다. 이것을 비유한 내용이 바로 귀신 한 마리가 나갔다가 일곱 귀신이 들어온다는 이야기죠. 여기서 귀신 한 마리는 바로 인본주의에서의 악이라면 일곱 귀신은 바로 인본주의에서의 선입니다. 왜 인본주의에서 선행을 일곱 귀신이 들어온 것으로 표현하셨을까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도둑질을 하게 되면 ‘나는 나쁜다는 것’을 알면서 하게 되는 행위죠. 즉, 언젠가는 반성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반성을 한 후 교회에서 ‘구제’에 힘쓰면서 타인들에게 칭찬받는 삶을 살고 거기에 만족한 삶을 산다면 이 사람은 절대 자신의 선이 악한 것임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누가 ‘구제’에 힘쓰는 자기의 삶을 죄라고 반성하겠습니까? 절대 못하죠. 그런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절대 예수님의 필요성을 알지 못하죠. 구원에서 완벽하게 멀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일곱귀신(완벽수7)이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죠.
이 땅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선과 악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은 참선과 참악 즉, 예수님과 함께 있음(참선)과 예수님과 분리됨(참악)을 알게 하려는 표지판일 뿐이죠.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짐승들을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나누어서 부정한 짐승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시죠. 그리고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그것을 지켜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세요. 부정한 짐승을 창조한 분이 누굴까요? 하나님이시죠. 완벽한 모순입니다. 그러면 이게 뭘 의미할까요? 정확하게 하나님께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가지고 그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한시적 시스템'안에 가두어 놓으신 것입니다. 인본주의 내의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을 허락하시고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알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죠. 물론 답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에 보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열매는 오직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열매인 예수님을 보시고 나도 예수님(예수님의 지체)으로 여겨 주시게 되는 것이죠. 오늘의 묵상의 결론은 조금 드라마틱하게 꾸며보죠.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온유'라는 열매를 맺으려고 합니다. A사람은 온유라는 열매를 도저히 맺지 못함을 알고 끝내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게 되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게 되어 손에 '예수님의 다리'라는 열매를 쥐게 되죠. B사람은 자신이 온유라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고 나름 그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 사람의 손에는 '자신이 맺었다는 온유'를 손에 쥐게 되죠. 이 두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열매를 보고 판단하신다고 이미 '선고 기준'을 예고 하셨죠. 그래서 A사람의 열매를 보니 '예수님의 다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라는 열매를 맺은 그 사람에게 절대 심판을 내릴 수가 없죠. 예수님은 이미 모든 죄의 댓가를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B사람의 열매를 보니 '자신이 맺었다는 온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기준의 온유'의 잣대를 가지고 그 사람을 심판합니다. 그래서 모자라게 되면 절대 하나님의 기준으로 운영되는 천국에는 들어올 자격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은 그 사람의 행위로 그 사람을 판단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