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오늘의 묵상은 마태복음 5장-7장에 걸친 산상수훈이 끝난 직후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의 시작점이죠. 산상수훈은 성경의 본질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부하나님께서 십계명의 전반부만 설명하시고 넘긴 것을 예수님께서 십계명의 후반부를 중심으로 설명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죠. 두 분은 같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이런 디테일한 부분도 너무 감동이지 않습니까?) 또한 이 율법은 우리가 지켜 내라고 주신 것이 목적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지켜 낼 수 있다’로 만들었습니다. 어떻게요? ‘외식과 누룩’을 섞는 방법을 통해서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켜낸다’가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만 품어도 간음’ ‘ 형제를 미워해도 살인’ 등등.... 즉, 모든 율법은 오직 예수님만 지킬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죠. 결국 우리는 말씀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게 만드신 것이죠. 그 하나님의 은혜의 현현하심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이것을 '난 할 수 있다.' '난 한다.' 난 했다.' 의 고지에 서 있던 자들이 '바리새인'이었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꼭 집어서 바리새인의 시대에 오신 이유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가장 바라는 신앙이 바로 '바리새인'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경계하신 것이죠.
지금 교회에서 가장 존경하는, 멋진 신앙인을 떠 올려 보세요. 어떤 사람이 떠 올려지죠? 그러나 교회에서는 단 1의 인간의 영향력도 모두 부인되어져야 합니다. 오직 교회에서 우리가 떠 올려지는 것은 예수님 뿐이어야하죠. 그런데 어떤 인격좋고, 말씀좋고, 신앙좋은 사람이 떠 올려진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이 쪽이나 인격과 신앙을 좋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그 사람이나 모두 바리새인의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2-3일씩 금식하고 그 금식한 돈으로 과부와 고아를 돕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지키기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에 예수님은 선을 그었죠. '이 독사의 새끼들아~~' 가장 심한 욕을 하셨습니다.
복음에 눈을 뜨신 분들은 거듭난 분들입니다. 이 분들의 앞으로의 삶은 복음의 확장입니다. 복음(믿음)의 확장은 나를 부인하는 것, 나의 무가치함, 나의 죄됨을 완벽하게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무가치함의 영역이 넓어질 수록 복음(예수님의 믿음)이 확장되는 것이죠. 이것을 구원이라는 주제로 전환해서 말씀드리면 '구원은 나의 역활이 1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으로 만들어진다.' 입니다. 이것을 산상수훈이 끝난 직후 기적의 에피소드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마친 예수님의 첫 사역이 바로 ‘나병환자’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직후 나병환자의 기적을 연결시킨 이유를 심도 있게 묵상해야합니다. 성경의 순서 구성 자체도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죠.
‘왜 첫 기적이 나병환자“일까? 일단 정답은 ’내가 나병환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이며 ’공동체에서 격리되어야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죄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웃긴 것은 이 나병이 온 몸을 전부 덮게 되면 ’부정한 자‘에서 ’정한 자‘로 인정 받는다는 것입니다. 재미있죠? 인본주의 사상, 곧 인과율에 길들여진 우리의 머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죠? 그래서 성경은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이 아니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책입니다.
왜 나병이 온 몸을 덮으면 ‘정한 자(깨끗한 자)’라고 선언될까? 이것을 복음으로 바꾸어서 해석을 해 보면 ‘자신이 전적타락한 자’라는 것 혹은 자신이 ‘완벽한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자는 반대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 즉, ‘정한 자’라고 칭하여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위기13:13 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죄를 지은 적은 있지만 ‘나 보다 더 심한 사람이 많아’ 혹은 ‘내 죄는 그래도 이해할만 해’ 등등 으로 ‘자기기만의 스스로의 위로’를 하면서 살아가죠. 그것이 바로 나병이 내 몸에 있지만 아직 온몸에 퍼지지 않아서 '괜찮은 줄 아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가 가장 ‘부정한 자’라고 성경은 설명을 하는 것이죠. 그러나 나병이 온 몸을 다 덮어 새 살이 보이지 않게 되면 ‘난 온통 나병 뿐이구나~~’라고 여길 수 밖에 없게 되죠. 그런데 이런 상태가 돼서야 ‘정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아이러니 입니다. 복음은 인본주의 방향에서 아이러니할 수 밖에 없죠.
또한 ‘나병의 속성’을 잘 아셔야합니다. 나병이 왜 복음을 설명하는데 가장 크게 사용되었을까요? 나병은 바로 온 몸이 썩는 병인데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해서 내 몸이 썩어 가는 줄 모르는 병입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을 정확히 설명하죠.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사는 것이 죄의 실체인데 우리는 이것이 나를 완벽하게 죽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죠.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인본주의(죄)에 묶여 있기 때문이죠. 그 인본주의 꼭대기에서 탈락하는 아픔만 느낄 뿐입니다. 성공, 건강, 자존심, 인간관계, 돈, 미모, 권력, 인격, 명예, 인기, 이런 종류의 꼭대기를 바라보는 욕심과 지금의 위치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미래의 두려움만 가지고 있죠.
그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바로 나병환자를 고치신 이유는 정확하게 우리의 상태를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하다’고 인정받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나의 완벽한 죄 됨’을 고백하는 것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나병환자는 자신의 병을 감추지 않고 예수님께 나와 고침을 받게 되죠. 이것이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또한 오늘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나병환자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오늘의 묵상 중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기도를 할 때 ‘주님 내가 이것을 원하오니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하죠.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고백을 하죠. 즉, 기준이 자신(나병환자)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죠. 재미있게도 여기에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라는 단어를 특정해서 화답하시죠.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면서 '주문의 완성'으로 사용 하죠.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하실 것입니다.’라는 기도의 검증 시간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기도만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기도'는 매우 짧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하실까?'의 기도 검증 시간은 묵상의 형태로 매우 길 수 밖에 없죠.
예를 들어 보죠. '내 아들 서울대 가게 해주세요'라고 5초의 기도를 하셨다면 이 후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하셨을까?'를 5일, 50일, 5년, 50년의 검증 시간(긴 묵상)을 가져야합니다. 이렇게 묵상하다 보면 결국 이 기도는 '예수님이라면 안하시겠다.'라는 결론이 나게 되죠. 그런데 그것을 알게 된 자들은 조금씩 복음의 눈이 떠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런 자들은 예수님이라면 할 만한 기도를 하게 되죠. 그런데 그 기도를 가만히 묵상해보면 예수님이 이미 다 이루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 '다 이루어진 것이네' 라는 앎(믿음)을 얻죠. 그래서 성경은 '기도하면 이미 받은 줄로 알라'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두 손을 드는 행위가 처음에는 "주세요"라고 손을 드는 것이지만 나중에 복음에 눈을 뜨게 되면 "항복합니다."로 손을 드는 행위가 되죠.
이렇게 구원 받은 자들이란 복음을 알아 듣게(믿게) 된 자들이란 말이며 이 말은 오직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이기 때문에 이 자들이 기도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홀로 다 이루신 예수님의 품안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해야하는 참기도는 미래의 요구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이룬 것에 대한 확인일 뿐이죠.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결국 우리의 인본주의적 욕심과 두려움의 부산물일 뿐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기도해서 이루어 지지 않는 이유가 '첫째 기도를 안해서 둘째. 정욕을 위해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의 부흥(양적성장)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것도 완벽하게 정욕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나의 확장'으로써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죠. 즉, 인본주의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완벽하게 똑같은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능력을 행한 후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하셨죠. 이것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오히려 이런 많은 무리 중에서 소수의 사람을 뽑아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그물에 가득한 고기를 끌어 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는 것'이라고 가르치시죠.
우리는 그동안 왜 이렇게 엉뚱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마 이 글을 묵상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만 복음에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미 예견하고 있죠. 그리고 예수님 조차 선택받지 않은 자가 복음을 알아 듣는 것을 '두렵다'고 했을 정도로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은 완벽한 '예정론'적 자세를 고수하고 계시죠. 혹시 이 묵상을 통해 이해가 되고 복음을 알아듣게 되는 분이 계시다면 그것은 정말로 할렐루야 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