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어제 나병환자의 묵상 중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나병환자가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말하는 부분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노니~~’ 라고 했죠. 즉, 구원의 주체가 예수님께 있다는 것이 어제의 묵상 포인트입니다. 산상수훈이 끝난 직후 예수님께서는 연달아 3번의 기적을 행하시는데 그 모든 기적이 포인트가 바로 ‘구원의 주체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 중 오늘은 그 두번째인 ‘백부장 하인’의 에피소드에 대하여 묵상을 해보도록 하죠.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괴로워한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지라’고 하시죠. 그러나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셔도 내 하인이 낫겠다’고 하죠.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칭찬하면서 ‘네 믿음 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죠. 그리고 하인은 즉시 낫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늘 오해하고 있는 포커스가 있습니다. ‘이 백부장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져라’의 방향이 결코 포커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병이 낫는 것’은 ‘기적적 병치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구원을 설명하는데 가장 좋은 재료가 '병치료'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신 것 뿐이죠. 즉, 이 하인이 병을 낫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 이 하인이 포커스가 아닙니다. 이 하인이 그 당시 구원을 완벽하게 ‘얻었다. 못 얻었다’ 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하인은 지금의 ‘나’의 역할을 맡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대상으로써의 나를 상징하는 인물로 선정이 되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인지하셔야합니다. ))
구원의 대상인 하인은 그 자신의 노력과 기도로 구원(병 나음)을 얻은 것이 아니었죠. 이 하인이 한 일은 그냥 누워있었던 것이 전부였죠.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이 하인의 구원은 예수님의 열심(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 관계 중간에 등장하는 백부장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 맨붕이 오죠. 많은 사람들이 백부장의 역할을 ‘중보기도’의 중요성으로 인식하죠.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중보(도고)기도를 열심히 하자~~’의 결론으로 가르치기도 하죠. 그러나 이 말씀은 절대 여기에 포인트가 있지 않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조금 어렵습니다. 잘 따라오세요. 여기서 백부장은 예수님의 역할입니다. 즉,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역할이 되시는 것이고, 백부장이 예수님이 되며, 아픈 하인이 바로 '내'가 되는 것이죠. 죄인 된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나의 구원을 기도드리는 장면인 것입니다. 백부장의 상황을 접한 예수님께서 이것을 복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사용한 것 뿐 입니다.
당시 백부장의 간구와 고백 그리고 그 당사자인 병든 하인의 상황을 직면하시면서 ‘복음의 핵심을 잘 설명하겠구나’라고 대답하시는 말씀이 바로 백부장에게 ‘이스라엘 중 이 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조금 더 쉽게 의역하면 ‘내가 이스라엘에서 사역 하는 중에 이처럼 복음을 잘 설명한 상황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라는 의미죠.
잠깐! 만약 잘 이해하셨다면 여기서 문제 하나 드립니다. 잘 맞춰보세요. 이 당시 예수님이 믿음이 좋다고 가리킨 ‘백부장’은 과연 믿음이 있었을까요? 답은------------->>>>‘ 없었습니다. ’ 이 당시 백부장의 믿음은 그냥 상징적 믿음일 뿐입니다. 실체적 믿음을 설명하기에 매우 적당한 ‘도구적 의미의 믿음’이기에 그 부분을 칭찬한 것 뿐이죠. 백부장의 믿음을 너무 폄하시키는 것 아니냐구요? 성경의 한 구절을 통해 설명해 드리죠.
“ 마가복음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믿음’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12명을 선택하여 제자로 삼으셨죠. 이들은 예수님과 3년을 붙어 다니면서 말씀을 배웠죠. 이렇게 특별히 선택하고 가르친 제자들도 결국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죠.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그런데 느닷없는 ‘백부장의 믿음’이 ‘참믿음’을 스스로 가진 자라고요? 해석의 방향(특히 포커스, 촛점)이 잘못 된 것 뿐입니다.
또한 백부장은 이방인(로마)으로 표현되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속한 자가 아니죠. 이것은 더 넓게 해석하면 예수님은 인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이방인(나그네)이 되십니다. 또한 구원의 범위를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중간에 ‘본 자손들이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나오는 것이죠. 즉, 이스라엘은 참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참 구원의 대상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기 위한 ‘셈플’ 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 성경을 조금 자세히 가르치는 교회는 구약의 율법 중에 '나그네법'같은 것도 가르치죠. 이 나그네법은 나그네가 마을에 들어오면 그 마을이 나그네를 매우 잘 대접해야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법을 만드신 이유는 '인간의 복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그네셨기 때문이죠. 이것을 잊지 말고 나그네 되신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해야하는지를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까지 볼 수 있는 설교자들이 많지 않죠. 모두 인본주의 종교(기독교)에 묶여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꼴이죠.[성경 말씀입니다.] ))
이렇게 갑자기 이스라엘이 셈플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이유는 이 에피소드의 백부장도 셈플이라는 것을 가리키기 위함입니다. 이 백부장 혹은 백부장의 믿음 쪽으로 포커스를 맞추게 되면 망합니다. 포커스의 대상은 오히려 ‘병 나은(구원받은) 하인(나)’ 입니다. 물론 포커스의 주체는 예수님이죠.
마지막으로 아셔할 것은 이 하인의 병이 바로 ‘중풍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의 죄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죠. 어제 묵상한 ‘나병’의 속성이 몸이 썩어 가는데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죄의 속성과 같다는 것을 말씀드렸죠. 중풍병은 몸이 마비 되어서 원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병입니다. 그것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래 지은 바인 "은혜의 몸"이 마비된 상태임을 가리키는 것이죠.
[[[[ 번 외로 조금 짧은 묵상 한가지를 더 해보죠. " 그렇다면 우리가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하는가? " 이것을 묵상하기 전에 다른 것을 한가지 더 묵상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병을 주셨을까? " 이것을 묵상하기 전에 또 다른 것을 한가지 더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죽음을 주셨을까? " 번 외 묵상이므로 짧게 짧게 넘어 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을 주신 이유는 벌이 아닌 은혜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죽음'을 인식해야 비로서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실체가 아닌 상징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종의 '나팔'역활을 하죠. 즉, 죽음 건너의 세상에 대한 묵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거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인본주의의 영향이 너무나 강합니다. 이 땅의 삶에 꽁꽁 묶이죠. (땅 지 묶을 옥 ) 이 땅의 삶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바로 죽음을 내리면 더 이상 묵상할 기회가 없죠. 그래서 하나님은 '병'을 주신 것입니다. 즉, '병'은 '죽음의 예고편'입니다. 심한 병이 들면 누구나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죽음을 다시 생각해서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것을 묵상하게 만드는 지푸라기인 셈이죠. 결국 '병'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제 '병든 사람을 위해 어떻게 기도를 해야할까? '에 대한 답이 나왔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결국 이 기도의 핵심도 '주님이 원하시는 바 대로 끌고 가소서!!~~~'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복음을 묵상하지 못한 채 병이 낫게 되고 다시 인본주의 삶에 묶여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김집사님과 박목사님 기도 덕분에 내가 병이 낫게 되어 다시 가게에 나와 돈 잘 벌어서 우리 가족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로 결론짓게 되죠. 우리가 도대체 이런 신앙을 갖게 된 이유가 뭘까요? ]]]
우리의 신앙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셔야합니다. 성령께서 가르치지 않는 모든 신앙의 가르침은 버려야합니다. 복음은 단 한가지만 알아도 전부 다 안 것으로 인정됩니다. 그러니 오직 복음에 눈 뜨는 것 만을 위해 기도하세요. --- 왜 예수님의 마지막 대인 사역이 십자가 좌,우편 강도 사역이었는지를 묵상하셔야 합니다. 그 우편의 강도는 오직 "원하시면~~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대답 한가지만으로 복음에 눈을 떴고 유일하게 예수님께 "너는 천국에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선언된 인물이죠. 이 강도에게 행위가 필요했다면 다시 더 살아서 '성화'를 쌓아야겠죠. 아닙니다. 오직 복음에 눈을 뜨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이것을 '거듭난다'라고까지 표현하시죠.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까지 표현하십니다. 오직 이것만 기도하세요. 복음에 눈을 뜨게 해달라는 기도만 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것도 하지마시고 '기다리는 자'의 삶을 사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