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내려오면서 연달아 행하신 3번의 기적의 에피소드는 ‘나병환자의 고침’ ‘백부장의 하인의 고침’ ‘베드로 장모의 고침’입니다. 이 세가지 에피소드의 공통점은 ‘오직 구원의 주체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으로 사역을 시작하셨고 그 산상수훈에서 우리에게 말씀과 율법의 본질과 실체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가르침을 하셨죠.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맞긴 하지만 그 목적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과 율법을 온전히 이루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인 것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것을 믿게 되면 우리도 말씀대로 산 자로 여겨짐 당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예수님의 신부 혹은 예수님의 지체로 표현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은 이런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내가 할 수 있다.' 의 방향으로 나갑니다. 인본주의 습성이죠. 즉, 구원의 대상이 아닌 구원의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죠. 똑같은 선악과 사건의 반복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경계를 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 오자 마자 3가지 에피소드를 연달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나병환자의 에피소드에서 나병환자가 '제가 병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면~~~ 낫겠나이다’ 라고 하죠. 이에 예수님께서 꼭 찝어서 ‘내가 원하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오직 병 낫음(구원)의 주체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강조 하셨죠. 백부장의 하인은 아애 예수님을 만나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이 보이지도 않는 먼 거리에서 오직 ‘말씀’으로 낫게 하셨죠. 즉, 백부장의 하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의지만으로 병을 낫게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물론 중간에 ‘백부장의 간구와 믿음’이 있었죠. 그러나 이 '백부장의 간구와 믿음'은 중보자 예수님의 역활을 설명하시기 위해 등장시킨 배역일 뿐이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나병환자도 어째든 본인이 와서 부탁을 한 것이고, 백부장의 하인도 어째든 백부장이라는 사람이 와서 부탁한 것이 아닌가? 이런 과정이 있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즉, 구원에는 어째든 사람의 역할(기도가 하던, 그 무엇을 하던)이 조금이라도 필요하지 않나? 라고 여길 수 있겠죠. 그래서 이 3번째 에피소드까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다짜고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서 열병으로 앓아 누워있는 베드로 장모를 보시고 병을 낫게(구원)하시죠. 그 누구의 간구와 기도도 없이 오직 예수님께서 직접 스스로 원해서 구원(치료)를 하신 것입니다. 즉, 오직 구원은 예수님이 원해서 , 말씀을 통해, 스스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에피소드를 누가복음에서 보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위해 사람들이 예수님께 먼저 간구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때 누가복음은 '예수님 스스로' 를 초점으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누가 복음은 '인본주의와의 분리'에 초점을 두고 있죠)
다시한번 반복해서 말씀드리면 이렇게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율법을 완성 시키고 그것을 스스로 다 이루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오해하고 ‘지극정성’을 통해서 자기가 해 보겠다고 다시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를 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경계하시기 위해 3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 아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서 직접 스스로 이루시는 것이다. ’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한 숫가락도 얹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을 바라는 대상입니다. 은혜의 주체가 되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꼭대기로 올라 갈수록 이런 방식을 요구하죠. 즉, 남을 도와라, 남을 위해 살아라, 남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전부 성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서 이렇게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본주의에 묶여 버리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죠. 즉, 이렇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 보아야 하는데 ‘누룩’을 섞어서 이것을 행할 수 있는 자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서로 서로 '잘했다'고 인정하기도 하고 서로 서로 못한 것을 '그럴 수 있다'라고 위로하기도 합니다. 특히 교회가 그렇죠. 조심하셔야합니다. 복음은 그렇게 녹녹치가 않습니다. 복음은 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요구합니다.
지금 주일학교에도 이런 인본주의 심리학과 교육학이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이런 좋은 방법들을 복음의 틀 안에서 사용한다면 매우 휼륭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냥 인본주의 심리학과 교육학에 머물죠. 눈치 채셨겠지만 인본주의도 하나님이 허락신 부분입니다. 복음의 실체를 알아갈 수 있는 도구로 인본주의를 허락하신 것이죠. 그러나 문제는 이 인본주의에 묶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교사들은 종종 학생들이 토론할 때 나와 의견이 맞지 않으면 그것을 틀리다고 하지 말고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의 의견도 인정하라고 가르치죠. 교육 심리학으로는 매우 휼륭한 방법이지만 복음의 방향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방법을 대하고 나서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것 뿐이다. 저런 방식으로도 어째든 구원에 도달 할 수도 있다고 인정해야 저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겠구나'의 방향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방법은 확고합니다. 복음에 있어서 타협은 없습니다. 심지어 복음을 받지 않는 자에게서 나와서 신발을 털라는 이야기까지 하시죠. 이런 예수님께 '그런 행동은 하지말고 그냥 저사람의 의견도 나와 다를 뿐이라고 인정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까? 그런데 이런 종류의 모습이 지금의 교회의 실정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세상의 인본주의와 인본주의 종교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매우 노력하죠. 완전히 복음의 가르침과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인격을 이야기해도 평생 그것에 정진하는 불교의 스님들보다 더 휼륭한 인격을 갖게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충성과 순결을 이야기해도 이슬람보다 더 큰 순교를 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인내와 고행을 한다 해도 힌두교보다 더 큰 고행을 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양적부흥을 한다해도 세상의 양적 팽창(부)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들과 경쟁하죠.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성경 어디에서도 이렇게 하라고 하신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못하니 예수님만 믿어라'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인격으로, 사회사업으로, 도덕으로 경쟁하고 인정받으려 하죠. 지금 교회의 목표(끝)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완전히 다르죠. ( 다르다 이 끝 단 )
한가지 더 예를 들어보면 명확해 집니다. 성경에서 유독 '구제'에 힘쓰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뭐죠? 특히 과부와 고아의 구제에 힘쓰라고 나오죠. 그 이유는 구제가 구원을 매우 잘 설명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하게 여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반대로 우리의 열심과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죠. 또한 과부는 신랑 예수님을 잃어버린 신부를 설명하고, 고아는 아버지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녀를 설명하죠. 전부 복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회사업에 묶여서 즉, 인본주의에 묶여서 구제를 실행하고 토론하죠. 그래서 제직회의 때 보면 구제헌금과 장학헌금의 쓰임과 용도를 토론 할 때 '과연 저 사람이 우리가 도와주면 신앙생활을 잘 할 것이가?' '과연 저 학생이 장학금을 받을만큼 성실한가' '저 사람이 구제헌금으로 도와 줄 만큼 교회 출석을 잘하는가? ' 등등의 기준이 들어가죠. 아닙니다. 오직 구제의 기준은 '불쌍함'입니다. 즉,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보면 안됩니다. 그것은 인본주의식 구제입니다. 오직 구제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군가만 봐야합니다. 그래서 '구제'의 의미를 이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겠구나~'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지킨다(keep)는 의미입니다.
즉, '말씀을 지킨다'라는 의미는 그것을 '우리가 행한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 즉,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복음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keep)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씀을 우리가 행하는 순간 100% 그 말씀은 훼손됩니다. 왜냐하면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려 하면 그 안에 '누룩'을 살짝 가미해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의 신앙은 지금 인본주의로 짬뽕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만든 곳이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죠. 그래서 아마겟돈의 최전방은 바로 교회입니다. 가장 복음이 많이 훼손되는 곳이죠. 오죽하면 성경은 '너희는 가르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겠어요. 방법은 오직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를 끌고 가시는 수 밖에 없죠. 오직 이것만 기도하세요.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부분을 보죠.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예수께 수종들더라’라고 표현되어 있죠. 이 말은 오직 예수님의 뜻대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예수님께 영광돌리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천국의 모형이죠. 성경은 전부 복음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