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8:16-22(21.09.17.금)

은혜바라기 2021. 9. 17. 09:28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저물매’ 성경에서 단어 하나 하나에는 복음적 의미가 전부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부족한 인간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알아듣지 못 할 뿐이죠. 성경에서 저문다는 것 즉, 저녁이라는 뜻은 대부분 복음의 빛이 없는 시간 즉, 인본주의를 뜻합니다. 신본주의(빛 되신 하나님 기준)의 완벽한 반대의 의미가 바로 인본주의(인간기준, 즉, ‘나’(혹은 확장된 나(공동체)의 기준)입니다. 이 인본주의의 시작이 바로 ‘선악과’죠. 선악과 에피소드는 결국 인본주의의 초기 형성과정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치료하고 귀신 들린 자를 치료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가 바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를 가리키는 가장 좋은 표지판이기 때문입니다. ‘병든 자’라는 것은 신본주의로 창조된 우리가 인본주의라는 병(죄)이 들어 죽어가는 상태를 의미하죠. ‘귀신 들린 자’가 표지판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인본주의가 특히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여 인본주의에 묶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 표현은 조금 이상하죠?  예수님이 우리의 병을 낫게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을 담당하시고 짊어지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죠. 그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보면 ‘부정한 것’에 손을 대면 그 부정한 것이 그대로 옮겨지죠. 즉, 예수님이 우리의 병을 낫게 하신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병을 가져가신 것입니다. 이것의 최종판이 바로 십자가죠. 우리의 죽음을 본인이 가져가신 것이죠. 너무 은혜스러워서 가슴이 먹먹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이 부분도 매우 깊게 묵상을 해야 합니다. 무리가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피난시키고 본인도 이런 상황을 항상 ‘피하는 것’으로 표현하십니다. 지금의 교회와 완벽한 반대 현상이죠. 지금의 교회는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을 불러 모아서 확장시키고 이것을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는 오직 복음 뿐 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어떤 것도 다 이용하시죠. 복음을 설명할 수만 있다면 (즉, 우리를 구원하는데 지푸라기라도 사용하여 설명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무엇도 활용하여 설명하셨고 심지어 기적와 이적을 통해서도 그것을 설명하신 것 뿐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본질(복음의 설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능력)을 통해 내 삶이 나아질 것을 예상하고 모여드는 것이죠. 즉, ‘잘 살기’에 묶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때 마다 예수님은 그 장소를 피하십니다. 이것을 매우 매우 경계하셨죠. 복음을 통해 ‘잘살기’ ‘행복하기’로 향하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 경계하셔야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후의 싸움인 아마겟돈입니다. 정말 정말 조심하셔야합니다. 

 우리의 모든 욕심과 두려움은 결국 ‘잘살기’에 묶여 있죠. 이 ‘잘 살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특히 자녀가 ‘잘 살기’만을 바라지 마세요. 왜 야곱이 죽기 전 12 자녀에게 축복이라고 던진 유언들에 ‘저주’가 많이 섞여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어떤 자녀는 ‘그 저주’를 받아서 고난에 처해야만 복음을 볼 수 있는 성품이기 때문에 그 저주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와 손자들에게 자꾸 ‘잘살기’만을 바라는 듯한 언행은 그 자녀가 늘 ‘잘살기’만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라는 강력한 가이드라인을 형성하기 때문에 이것은 오히려 강력한 저주가 됩니다. 즉, 바벨탑의 꼭대기만를 바라보며 살게 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드마라 펜트하우스의 꼭대기 층을 목표로 살아가는 삶을 그린 이야기도 어찌 보면 복음을 설명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죠. 이 펜트하우스는 정확하게 바벨탑을 그린 것이죠. 정확하게 아셔야할 것은  인간의 모든 문화(음악,영화)도 결국 하나님이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창조물들의 퍼즐을 다른 모양으로 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결국 복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짜로 복음의 눈이 크게 확장이 되면 심지어 '드라큘라 영화'를 보면서도 복음이 설명되죠. "피를 빨아 먹어야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사람" 드라큘라는 내가 되고, 선량하게 피 빨리는 사람은 예수님이 되죠. 그 피를 빨아 먹으면서 영생을 사는 드라큘라는 내가 됩니다. 참 신기하죠. 뭘 봐도 그것이 전부 다 복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비합니다.  물론 복음에 눈을 뜬 자들에 국한하죠. 그런데 이것을 몇 천년전에 이미 성경을 통해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인 솔로몬입니다. 그는 전도서에서 이미 "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라는 표현으로 이 메카니즘을 알아차렸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을 말씀하시죠.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은 성전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전은 바로 ‘교회’를 말하죠. 즉, 이 세상에 진정한 교회가 없다는 것을 뜻하죠. 좀 더 의역하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스스로 믿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하나님)을 믿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자가 바로 예수님의 영적 거처가 되죠. 그런데 그런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죠. 오직 인본주의에 묶여 사는 자들만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실 수 밖에 없었고 그 분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구원을 해 나가시는 방법 밖에 없는 것이죠. 계속 말씀드리지만 '예수를 믿다'는 틀린 말입니다. '예수로 믿다'가 맞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이렇게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을 예수님은 ’죽은 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 표현하신 에피소드가 바로 ’에스겔의 마른 뼈‘입니다.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나게 되죠. 지금의 우리는 전부 죽은 자입니다. 움직이지만 죽은 자(좀비)죠. 이것은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선언하신 바입니다. 

 좀 더 잔인하게 말씀드려 볼께요. 좀비는 오직 피와 살 즉, ‘먹는 것’만을 탐하면서 갈구하죠. 지금 TV를 한번 켜 보세요. 오직 무엇을 먹는가? 어떻게 먹는가? 얼마나 먹는가? 어디서 사는가? 얼마나 큰 곳에 사는가? 무엇을 입는가? 의 잔치 같이 않습니까? 간혹 인기, 명예와 같은 것도 방영하지만 성경은 그것도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인본주의 꼭대기에 전부 몰려 있죠. 이것을 위해 노력(욕심)하고 이것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노력(두려움)하죠.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전부 ‘죽은 자’라고 합니다. 즉, 좀비들의 움직임일 뿐입니다. 

 오직 살아 있는 자는 예수님 뿐이며 예수님께서 찾은 자들 곧 그 분의 신부, 곧 그 분의 지체만이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죠.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그 정도로 ‘복음을 알아듣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스스로는 불가능하죠. 오직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눈을 뜨게 만드시는 법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하나만을 위해 기도하세요. 

 

 추석 잘 지내세요. 추석 연휴 끝날 때 까지 묵상은 축석방학입니다.  ~~~~ 혹시 제사 때 가셔서 '절 하시는 것' 때문에 걱정하고 계시는 분이 있나요?  "나는 절 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 는 완벽하게 잘못 배우신 것입니다. 이것과 반대입니다. "혹시 내가 절을 하더라도 한번 택한 예수님은 절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 부분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가르치고 있는 목사들의 책임이 크죠. 물론 그렇다고 일부러 절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본질은 이런 것들은 우리한테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상의 실체는 그냥 '무가치'입니다.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복음의 눈을 뜨신 분들은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주세요. "때를 얻든 못 얻든" 전파해주세요.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막 꼭' 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마시고  오직 " 마음이 가난한 자"를 중심으로 전파해 주세요.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복음에 눈을 뜨고 이 글을 묵상하는 분들 중에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감당하기 어려운 박해를 받게 됩니다.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 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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