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성경은 오직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복음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 우리의 행위로 바꾸어서 읽으시면 안 됩니다. 또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부 다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 저들은 왜 저래!! ” 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예수님께서는 나의 어떤 상황을 어떤 에피소드로 설명하고 계시는가? ”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묵상은 바로 ‘구원관’에 관한 묵상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배에 오르신 것은 바로 ‘나와 예수님’이 구원이라는 한 배로 묶여 있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진행형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며 우리의 인생은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하나님께서 설명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 과정에 있는 우리가 어떠한 모습과 생각으로 구원을 삐뚤어지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 오늘의 에피소드입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났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고난을 이야기하죠. 그런데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배에 타고 있습니다. 즉, 구원이 성립이 된 상태입니다. ( 제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고난이 닥치니 죽을까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 믿음이 작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시죠. 바로 우리의 상태를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성령께서 그것을 가르쳐주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고난에 대한 두려움'에 놓여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죠.
믿음이 작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 a few~~ 가 아니라 few입니다. 즉, 작은~~ 의 뜻이 아니라 거의 없다. 라는 뜻입니다. ) 그런데 ‘믿음이 없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굳이 ‘믿음이 작다’라고 표현하신 이유는 이 제자들이 나중에는 ‘믿음이 있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때와 비교해서 ‘믿음이 작다’라고 상대적 표현을 쓰신 것이죠.
그렇다면 이 ‘믿음’의 정체가 뭘까요? ‘참 믿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믿음’이라는 정체는 실체적 믿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상징일 뿐입니다. 참 믿음은 정확하게 ‘앎’입니다. ‘무엇을 앎’일까요?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정확하게 알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앎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알려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다음 장면에서 제자들이 ‘이이가 어떤 사람이기에~~??’라고 말하는 표현을 넣으신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복음도 모르고 예수님도 정확히 모르고 있는 상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인본주의식 가르침으로 바꾸어 버리면 ‘고난이 찾아올 때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흔들어서 깨워서 부탁하면 고난이 멈춘다.’의 방향입니다. 매우 많은 설교자들이 했음직한 설교죠. 절대 이 방향의 길에 서시면 안됩니다. 이것을 인본주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경계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을 나무라는 모습 즉,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흔들어 깨워서 소원 성취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의 행태일 뿐이라는 것을 표현하신 것이죠. 그래서 심판은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이미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 복음을 알게 되는 자와 그것을 인본주의 종교로 듣게 되는 자로 갈리게 되죠.
예수님이 왜 주무셨는가? 에 관심 갖지 마세요. 이 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시는지를 알게 되면 자연히 예수님이 주무시는 장면도 ‘제자들의 행태’를 유도하여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구원받은 우리가 ‘복음을 앎(믿음)’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땅에 살아갈 때의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신 것 뿐입니다. 핵심은 ‘예수님이 주무시는 것 처럼 보여도 나와 예수님은 항상 같이 있음’입니다. '같이 있음' 여기에 집중하십시오.
((( 특히 인간관계와 돈의 현혹(고난)에 휘둘리지 마세요. 오직 예수님이 옆에 있음(정확하게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음)에 집중하세요. --- 어떻게 이것만 보고 살아??? 라는 현실감각에 현혹되지 마세요. 진짜 실체는 예수님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몰라서 외롭고, 고독해지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100% 받고 사는 여자는 돈, 집, 자식이 전부 다 필요 없죠. 남편 사랑의 결핍이 있는 여자들이 자식에게서, 돈에게서, 집에게서 그 결핍을 채우려는 것 뿐이죠. 아니 진짜 사랑 자체를 처음부터 받아 보지 못한 자는 그 결핍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는 경우도 태반이죠. )))
인간은 참 신랑이었던 예수님(하나님)과 분리된 그 시점부터 내면에 “절대 고독”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예외없고 절대로 스스로 치유가 안 됩니다. 이 절대 고독의 치유는 다시 하나님(예수님)을 만나는 것 뿐 이죠. 교회에서 만나는 공동체, 사회 친구들, 친인척과 자식들, 수 천명의 경조사 인맥들을 다 가진 자들의 마음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금물을 먹는 것처럼 그 때만 갈증(결핍)이 해소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심한 갈증인 ‘군중속의 절대 고독감’을 느끼죠. 그 많은 팬들에 둘러싸여 사는 연예인들이 왜 마약, 공황장애, 자살이 많은지를 생각해 보면서 묵상해 보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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