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8:28-34(21.09.28.화)

은혜바라기 2021. 9. 28. 08:1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귀신들린 자’를 영적 영역의 시각으로 보지 마십시오.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우리를 ‘귀신들린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인본주의는 우리의 정신과 생각을 지배하는 속성이 크기 때문에 이 인본주의를 매우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귀신들린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매우 빈번하게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 뿐 입니다. (‘사탄’의 존재도 우리의 옛자아를 설명하기 위한 표지판일 뿐입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정확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탄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적인 존재이신 예수님을 잘 알아본다.’로 이끌고 나가면 안 됩니다. 바로 이런 방식이 인본주의 종교(신비화)의 특성입니다. 오늘 이 에피소드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은 인본주의에 묶여서 버림받는 자들도 정확하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기도)은 전부 다 자기 자신을 ’죽게 만드는 결과‘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귀신은 돼지 떼로 들어가기를 바랬지만 결과는 죽음으로 이어졌죠. 

 이 부분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보면 ‘하나님~~ 예수님~~ 집값이 더 많이 오르게 해주세요~~.’ 라고 매일 교회에서 기도하는 박집사가 있다고 해보죠.  이 박집사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기도를 이루어 줄 능력이 있다고 믿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값이 더 많이 오르게=풍성하게=돼지 떼’ 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결과는 ‘몰살’이라고 성경은 표현했죠. 심판입니다. 

 이제 조금 말씀의 방향성을 인지하셨나요?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영적인 존재, 사탄, 귀신를 쫓아낼 수 있는 신비스러운 분이다.' 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포커스는 교회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의 인본주의 신앙생활에 대한 이야기와 그 결론이 초점입니다. 

 마지막 나온 구절은 더 재미있는 복음의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전부 목격한 온 시내 사람들이 예수님이 떠나가기를 간구하죠. 즉, 인본주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예수님은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풀면, 이 지방은 돼지를 키워서 부를 쌓았던 지역인데 이것을 예수님이 없애 버리니 ‘자신들의 잘 살기’에 도움이 안 되는 예수님은 필요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암에 걸린 자들에게 ‘참복음’을 전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교회에서 암에 걸린 자들에게 ‘하나님께 기도하면 낫게 해주신다. ’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혹은 우리가 암에 걸린 자를 위해 기도를 하는 것도 잠깐만 생각을 해보면 "그래서 저 사람이 병이 낫는다면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죠. 내 기도를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시고  그분의 십자가 형벌이 취소되고 평생 잘먹고 잘살게 되셨다면 그것이 관연 '옳은 길'인가? 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적 사고방식과 복음적 사고방식은 아애 차원이 다른 두 개의 세상입니다.  오죽하면 '거듭나야(다시 태어남)'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못 알아 듣죠. 그래서 복음을 '못알아듣는 방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방언은 전부 거짓입니다.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잠깐 성경에만 등장한 도구였죠. 이 블로그 카테고리에 특별묵상 방언편을 참고하세요)

 

 성경에서 병을 고친 에피소드를 자주 등장시킨 이유는 그것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암에 걸린 자들에게 참복음을 설명하려 한다면 오히려 ‘살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대가 병고침을 받는 것은 복음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상관도 없이 오직 '더 오래 잘살기‘에 해당하므로  기적이 적용 될 이유가 없습니다.’로 대화의 문을 열어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더 참복음적 대화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대화의 포문을 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닝겔병을 던져 당신을 쫓아 낼 것입니다. 이 장면이 바로 오늘 마지막 말씀에 나온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내는 장면'이고, 결국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장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이렇게 들어 줄 수가 없어서 결국 이 땅에서 우리가 죽여서 쫓아낸 것이죠. 지금의 교회는 그 복음에 누룩을 섞어서 '맛있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즐거운 것입니다. 참 복음은 대부분 다 변질되었죠. 

 

 참 복음을 대하면 '나의 끔찍함'에 스스로 무너져 버립니다. 나를 버리게 되죠. 그런데 이 때서야 비로서 참 예수님(빛)이 보이게 되죠.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때서야 구원의 빛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 십자가에 얼굴을 비비며 살게 되는 자가 되죠.

 이렇게 나를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에 얼굴을 비비며  행복해 하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16:24하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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