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중풍병은 자기의 의지대로 몸을 움직이기 못하는 병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는데 그 형상대로 살지 못하고 즉, 그 형상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람을 잘 설명하기 때문에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것입니다. 중풍병은 기도로 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병원가서 주사와 약으로 고치세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어진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누리시면 됩니다. ( 태양과 공기라는 일반 은총을 살인한 자도 똑 같이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자들도 병원가서 암도 낫고, 중풍병도 낫게 됩니다. )
오늘의 말씀에서 또 다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은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믿음’을 초점으로 삼아 ‘이렇게 믿음을 가져라 그러면 고쳐진다.’입니다. (어차피 눈을 뜨지 못한 자가 가진 한계라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그것을 듣고 잘못된 길에 설 수 밖에 없는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어쩔 수가 없네요.)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의 뜻을 정확하게 알면 모든 것이 명확해 집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의 참 뜻은 ‘그들의 행위가 복음을 설명하기에 좋다는 것을 보시고’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들의 행위가 복음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셨는지 풀어보죠.
침상에 누웠다는 것은 스스로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오직 긍휼만을 바라고 있어야 하는 우리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고, 그 병이 마침 ‘중풍병’이라는 것도 완벽하게 복음을 설명하고 있죠. 이것은 제가 서론에서 설명을 한 것을 참고하세요. 그리고 그 자가 오직 예수님과 만나게 되서야 치료되었다는 것이 바로 오직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리키죠. 예수님은 이 에피소드가 ‘병고침에 대한 사역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설명이란다.’를 지금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을 ‘병이 낫을 것이다’라고 안하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시죠. 이 부분을 다시 6절에서 정확하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
(( 복음을 이해하는 것과 복음에 눈을 뜨는 것은 완벽하게 다른 것입니다. 맹인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것과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의 차이죠. 즉, 맹인에게 "왼발 앞에는 가시덤블, 오른발 앞에는 돌맹이가 있다." 라고 말해서 "아! 내 앞에 이런 상황이 있구나!"라고 이해와 설득이 되는 것은 복음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의 목적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한번도 보지 못한 자가 어느 날 눈을 떠서 이 세상의 실체를 보게 되는 것과 같죠. 태양은 어떻게 생겼고, 노랑, 빨간색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실체로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자기의 이해와 설득을 통해서 알게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런 묵상 글을 읽고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복음의 진영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죠.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쥐겠다는 심정으로 쉬지말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