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라는 세리(죄인의 대표)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장면도 복음을 설명하기에 좋은 재료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이 된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지체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부르심’ 혹은 ‘예수님의 찾으심’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지극정성으로 예수님을 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방향성을 가진 것이 바로 인본주의 종교 즉,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공통점입니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은 정확하게 ‘천국’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인본주의 종교에 묶여 있는 자들은 이것을 이해 못 합니다. “왜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 있는가? 왜 천국은 오직 죄인만 가게 되는가?” 이 명제를 이해 못 합니다. 사실 교회에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은 다분히 ‘죄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 뿐이죠. 교회에서 죄인이어야 천국을 간다고 하니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 뿐입니다. 즉, 교회에 ‘휼륭한 크리스찬이 되기 위해 죄인으로 고백한다.’라는 모순이 생겨버린 것이죠. 왜 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본질을 못 보는 자들의 ‘외식’일 뿐입니다.
교회 목사에게 “당신은 죄인입니까? ”물으면 “아멘”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런 목사에게 “ 이런 위선자 같은 놈아 ”라고 손가락질 하면 아마 대부분 목사는 “얼굴이 벌게질 것입니다.” 전부 복음을 모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전부 다 ‘교회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죠. 이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율법’이라는 규칙으로 ‘교회놀이’를 하고 있었죠.
잘 들으세요!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은 정확하게 ‘이 세상의 인간 전부’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선악과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나서 ‘무가치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 인간이 이러한 상태였군요. 저는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본질은 완벽하게 무가치하게 전적타락한 상태였군요. " 가 진정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죠.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내가 여러 여자를 농락하고 간음한 경험이 있는 죄인입니다."의 고백은 회개가 아니라 반성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죄들(살인, 간음, 거짓말 등등)은 전부 다 죄의 본질이 아니라 죄의 증상일 뿐입니다. 즉, 기침하는 증상을 통해 '폐암'을 살필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방법이죠. 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를 살면서 자기의 죄를 반성하는 경험을 하죠. 이것은 교회 뿐 아니라 모든 종교 심지어 초등학교에서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 반성은 회개를 설명하는 표지판일 뿐입니다. 회개는 영적인 영역이고,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이 반성이라는 표지판 없이 직접 회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성이라는 표지판을 통해서 하나님은 회개를 이해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성령께서 진행하시죠.
교회 수련회 때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저녁에 촛불 켜고 마음을 자극해 주면 언제라도 눈물 흘리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 하곤 하죠. 이 때 교회 선생님들은 "할렐루야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거듭났다."고 위로하는 거짓 선생이 되면 안됩니다. 이 때 정확하게 "너희들이 오늘 한 이 반성을 가지고 진짜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지금부터 설명해주마~~"라고 이때 부터 복음설명의 출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의 상태였구나"라고 알게 된 아이들이 있다면 그때서야 바로서 "할렐루야"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중간에 그 회개를 막고 잘못된 셋길로 인도하는 선생들이 많이 있죠. 그 아이들은 평생 자기가 회개한 줄 알고 그 반성으로 휼륭한 기독교인 행세를 하며 살게됩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도 자기들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지옥으로 잡아 끌고 들어가서 더 큰 지옥자식을 만들어 버리죠. (이부분은 말씀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회개를 하게되면 자신의 무가치함, 무능력함, 무의미함을 알게 되죠. 이 때서야 우리는 비로서 ‘예수님의 절대적 필요성’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알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완벽하게 세계관, 인간관, 신앙관, 역사관이 통째 바뀌죠.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거듭난다’라고 표현하죠.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은 너무나 간단한 비유로 오늘의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는 의원이 필요 없지만 ‘병든 자는 의원이 필요하다.’라고 설명하고 계시죠. 이 말을 이제는 이해하시죠? 이 말을 교회에서는 지금까지 "오늘부터 나는 병든자가 될꺼야" 라고 사용하고 있던 것입니다. 너무 웃기지 않습니까? 복음에 눈을 뜬 분들은 이미 어떤 고백이 참 고백인지 아실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은 "아~ 내가 건강한 줄 알았더니, 병든 자였구나, 내가 이미 죽은 자였구나. 어떻하지!!"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매우 중요한 복음의 속성에 대하여 선언하십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하죠. 이 때의 제사는 우리의 신앙생활 전부를 가리킵니다. 헌금, 예배, 주일성수, 봉사, 헌신, 기도 등등 전부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전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만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동안 ‘금송아지 만들어 우상 섬기기’에만 몰두할 뿐이죠.
조금 과한 설명 아닌가? 라고 생각하시죠? 전혀 과한 설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결론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입니다. 즉, ‘나는 그래도 신앙생활을 힘닿는 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의인’입니다. 그런데 이 자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제사를 왜 인간한테 허락하셨을것 같습니까? 제사를 허락하신 목적은 인간은 단 한번도 완벽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려고 우리에게 제사를 몇천년동안 드리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과 인생살이를 전부 다 포기하라는 말인가?" 인본주의자들은 이렇게 알아듣죠. 이렇게 알아듣는 이유가 바로 ‘눈이 먼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던, 인생살이를 하던 열심히 하세요.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의 목적은 바로 ‘나의 열심’이 아니라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무가치함의 결과’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진짜 목적입니다. 그래서 점점 더 예수님의 필요성이 나의 인생의 영역에서 확장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던 '할수없음'이 결론이라면 처음부터 시도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죠? 이것도 ‘눈이 먼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인이 시도해 보지 않은 것에는 누구나 일말의 가능성을 갖게 됩니다. 이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애는 방법은 그것을 직접 노력해 보는 방법 뿐 이죠.
심지어 사람은 빨간 망토 두르고 아파트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슈퍼맨처럼 조금은 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정도의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3미터의 담에서 빨간 망토 두르고 뛰어 내려서 다리가 한 번은 부러져 바야 그 때서야 완벽하게 두 손 들고 ‘난 날지 못하는 구나’라고 인정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죄성을 만만하게 보지마세요. 사탄급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깨닫게 하려고 몇천년의 제사를 드리게 해도 인간은 그것을 끝끝내 '난 잘 드릴 수 있다.'라고 누룩섞인 제사로 포장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참 죄인’ 즉, ‘나의 완벽한 무가치함’를 깨닫는 것은 매우 매우 힘든 여정이 필요합니다. 그 여정이 바로 80년의 시간과 광야같은 “인생”입니다.
끝.
'마태복음(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9:18-25(21.10.05.화) (0) | 2021.10.05 |
---|---|
마9:14-17(21.10.01.금) (0) | 2021.10.01 |
마9:1-8(21.09.29.수) (0) | 2021.09.29 |
마8:28-34(21.09.28.화) (0) | 2021.09.28 |
마8:23-27(21.09.27.월) (0) | 2021.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