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금식’의 정의를 확실하게 알아야 오늘 말씀의 묵상이 원활할 것 같네요.
일반적으로 ‘금식’은 ‘식사를 금하는 것’을 뜻하죠. 그렇다면 식사는 무엇을 의미하죠? 하나님은 왜 사람이 식사를 하여 에너지를 공급받아 생명을 이어가게 만드셨을까요? 매우 귀찮은 시스템이죠.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렇게 만들지 않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만드신 이유는 바로 ‘ 식사하기를 통해 무엇을 설명하기 위함 ’입니다. 당연히 ‘복음’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음식을 왜 먹나?' 하면 '먹어야 살지'에 머무르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왜 사람이 먹어야 살아가게끔 만들어 졌는가?'까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창조가 아닌 '자연적' 혹은 '진화론적' 사고방식 즉, '우연과 우연이 겹쳐져 만들어진 현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자들 조차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안타깝죠.
하나님께서 만든 만물과 그 질서는 입이 벌어질 만큼 치밀하고 정교하죠. 그런데 그 중 가장 핵심 창조물인 인간에 대한 창조계획은 말할 것도 없겠죠. 그런 인간의 핵심적 생명유지 장치인 '식사'의 평생 반복적 행위가 아무런 의미없이 '그냥'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는 눈도 멀고, 귀도 막혔다'는 증거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떠나 죄인 된 우리는 '인본주의'에 묶여 오직 그것만 바라보며 살아가기 때문이죠.
인본주의에 묶이면 '식사'는 오직 '무엇을 얼마나 어디서 누구와 먹을까?'만 보이죠. 영적인 존재가 죽어 오직 육으로만 살아가는 현상입니다. TV를 켜고 모든 프로그램이 '먹는것'에 매달리는 현상을 보세요. 점점 더 잘 사는 나라가 될 수록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렇게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을 부러워하며 그것을 꿈꾸며, 희망하며, 노력하죠. 여러분! 이 구조에 갖혀 있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녁인 하나님께로 부터 벗어났다.' 라는 의미죠. 이제 다시 과녁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죠.
양식은 말씀을 뜻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바로 예수님을 뜻합니다. 즉, ‘우리는 말씀되신 예수님을 계속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계속 먹어야 살 수 있다’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바로 ‘음식 먹기’입니다. 이 세상은 전부 복음을 설명하는 그림자(표지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금식은 이것을 끊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죠?
금식은 인간이 양식되신 예수님과 끊어진 상태 즉,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임을 알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적 프로그램입니다. 이것을 바리새인은 ‘자기 의’로 바꾸었죠. 즉, ‘굶기 ’를 통해 더 높은 신앙활동을 하거나, ‘굶기’를 통해 ‘하나님께 떼를 써서 무엇이라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복신앙에 매달렸죠.
정확하게 아셔야합니다. ‘금식’은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입니다. 즉, 복음을 알아 듣던 내가 누룩이 섞이면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인본주의 종교화되고 있을 때, 금식을 통해 즉, ‘양식을 먹거리로만 알아 듣는 인본주의를 끊어 냄’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다시 ‘복음을 알아듣게 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금식’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우리 인생 전체’입니다. 위에서 제가 금식의 본질은 ‘복음을 알아듣게 하는 시간’이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프로그램이라고 했죠. 그런데 그게 바로 우리 ‘인생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징의 상징인 셈이죠. 어렵죠? 그래서 선택받은 자의 인생은 ‘금식’을 하는 것과 같이 평생 매우 힘듭니다. 그 대표자가 예수님이었죠.
이제 금식에 대한 방향성 잡혔다면 오늘의 말씀이 매우 매우 쉽게 느껴질 것입니다. 말씀을 보죠.
‘신랑이 있을 때 금직하지 말고 신랑을 빼앗길 때 금식하라’ 이 말씀은 정확하게 “예수님이 안보이게 되면 너희는 금식(인본주의 끊어 내기)을 통해 다시 예수님이 보이도록 해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이제 쉽죠?
그러므로 이제는 진짜 ‘굶기’를 통한 금식은 하지 마십시오.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이 하는 진짜 금식은 밥 맛있게 드시고 그 에너지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인본주의 삶(영향력)을 끊고 복음만 생각하는 시간 갖기”입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으십시오. 이것이 지금 시대에 가장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금식 프로그램’과 가까운 메카니즘일 것입니다. (지금 시간을 내서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이 정확하게 '금식'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생베 조간에 낡은 옷에 붙이지 말고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넣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죠. 이것은 복음과 인본주의가 같이 붙어 있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낡은 옷과 낡은 부대란 ‘구약의 율법 ’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구약의 율법을 인본주의로 풀어낸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율법을 인본주의로 풀어낸다는 것은 율법을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외식적 행위로 만들어서 그것을 지켜낸 것 처럼 '자기 의'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인본주의로 풀어낸 율법은 모두 외식이며, 복음이 적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새 약속 즉, 완성된 구원은 복음으로만 풀어 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더 요약하면 ‘오직 구원은 예수님’이라는 뜻이죠.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복음의 눈을 뜨신 분들은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 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마시고 오직 " 마음이 가난한 자"를 중심으로 전파해 주세요.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복음에 눈을 뜨고 이 글을 묵상하는 분들은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감당하기 어려운 박해를 받게 됩니다.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