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9:26-31(21.10.06.수)

은혜바라기 2021. 10. 6. 09:22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그 소문’이란 어제 묵상말씀에서 나온,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을 뜻합니다.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지죠. 즉, 오직 예수님 홀로 복음을 이 세상에 퍼트리시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이것을 오직 ‘기적 체험’으로만 인식하죠. 우리는 늘 인본주의에 묶여서 ‘잘살기’에 이용하려는 것에만 관심이 있죠. 그래서 항상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신 이후 그곳을 피하시거나 떠나가신다는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살기’ 로 풀어내면 예수님은 이미 우리 옆을 피하시고 없다는 말입니다. 

 이 후 두 맹인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소서’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 긍휼을 구하죠. 예수님은 성경에서 많은 기적을 보이셨죠. 그 기적은 모두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중 ‘맹인’의 기적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맹인이 복음을 설명하기 가장 알맞은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거듭나야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이 거듭난다는 말이 바로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이 세상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본질은 오직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하죠. 조금 더 쉽게 설명드리면, 우리는 자다가 꿈을 꾸죠. 꿈에서 우리는 그 때가 현실인 것으로 착각하죠. 그러나 잠에서 깨면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현실을 자각하죠. 복음을 알게 되면 이 세상이 정확히 꿈과 같이 실체가 아닌 상징, 즉,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표지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 세상은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거대한 표지판이라는 것을 알게 되죠. 이러한 현상이 마치 맹인이 눈을 뜬 것과 같은 현상이기에 예수님은 자주 이 에피소드를 사용해서 복음을 설명하신 것이죠. 

 

 맹인으로 태어난 자에게 '나비'을 설명해보세요. 이 단계에 와 있는 기독교인이 대부분이죠. 성경은 이 나비를 더욱 더 잘 설명하여 맹인이 나비에 대하여 완벽하게 알아 듣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의 목적은 '눈을 떠서 나비를 직접 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죠. 매우 휼륭한 설명(설교)을 듣고 나비를 상상하는 것과 눈을 뜨게 되어 나비를 보는 것은 완벽하게 다른 세상을 사는 삶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눈을 뜨게 되는 자들이 이미 태초에 정해져 있다고 하죠.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고 그 자들은 자기의 목자인 예수님을 알게, 즉, 눈을 떠서 보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의 선언은 '눈을 떠라'라고 하지 않고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하시죠.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 그 이유는 절대 인본주의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그래 이것봐~~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져야 우리는 눈을 뜰 수 있어 ’라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계속 말씀드렸듯이 ‘믿음’의 정의는 ‘복음을 알게 됨’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 말씀을 다시 풀어보면 '너희가 복음을 알게 되었구나 그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 다시 한번 '믿음'에 대하여 짧게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믿음'은 참믿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참믿음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은 예수님만 가지고 계신 성품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참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본주의 내의 표지판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사람이 가진 믿음이 전부 다른 색, 다른 모양, 다른 크기를 띄고 있죠. 

 

 우리 안에 참믿음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 말씀은 요한계시록의 '인치심'입니다. 우리는 죽은자, 즉, 완벽하게 검은색만 존재한 전적타락의 존재죠. 이 자들 중 택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하얀 분필'로 내 안에 '하얀 점' 한 개를 찍죠. 이것을 인치심이라고 합니다. 이 때 이 흰점은 내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은혜죠. 이 흰점이라는 안경을 통해 내가 완벽하게 검다는 것을 그때서야 보게 되죠. 설명이 아니라 이렇게 완벽하게 눈을 떠서 비교하여 내가 보고 알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참믿음'입니다. 즉, 눈을 뜨는 것과 같죠..

 

 이것을 모르고 자기의 믿음이 참믿음으로 알게 되면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상상속의 하나님 즉, 각자의 우상이 되죠. 그래서 교회의 종류도 많아지고, 파벌도 많아지고,  같은 하나님을 두고 교회에서 서로 싸우죠.  )) 

 그런데 이 맹인이 어떻게 복음을 알게 되었을까요? 이 맹인이 예수님을 보고 한 고백이 있었죠? 즉, ‘다윗의 자손이여’ 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는 바로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메시야)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표지판이었습니다.  이 맹인은 구약의 표지판이 가리킨 곳을 정확하게 바라본 것이죠. (정확하게 인도된 것이죠.)

 ‘불쌍히 여기소서’가 바로 복음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구원은 결코 우리의 노력과 지극정성이 필요없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지극정성은 쓰레기일 뿐입니다. 이 고백을 바울이 말년에 하죠.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을 제외한 모든것이 ‘똥’이라고 했죠. 하나님이 찍은 흰점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이 맹인들이 한 이 고백인 ‘불쌍히 여기소서’가 바로 ‘오직 구원의 핵심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러니 긍휼을 베풀어주세요.’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결론으로 ‘눈들이 밝아진지라’라고 표현하여 복음의 속성(믿음의 속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후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시죠. 그 이유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말해봐야 모두 인본주의적 해석으로 묶이기 때문입니다. 즉, ‘기적을 통해 잘살기’에 묶이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베푸신 이유는 복음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이고, 그 대상은 바로 이 글을 지금 읽고 있는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눈들이 밝아졌다고 표현된 자들 조차 예수님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가서 온 땅에 소문을 퍼트렸다고 표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 뿐임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적의 당사자 자체도 인본주의 기적에 묶여서 실제로는 복음을 아직 볼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즉, 이 에피소드가 이 글을 읽은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것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조금 어렵죠? 

 예수님이 잡혀가시는 날 제자를 포함한 모든 자들이 다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성경은 완벽하게 선언하죠. 이제까지 참복음을 알아듣는 자들이 한명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뭐야????  라고 헷깔리시죠? 복음은 정확하게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성령께서 오셔서 그 때부터 복음을 가르치시고 선택받은 자들을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을 ‘물리 시간적 순서'로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를 이해시키려고 물리 시간적 순서로 배치하신 것 뿐입니다. 정확하게는 ‘의미적 순서’로 받아들이셔야 됩니다. 천지창조 이 후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존재하셨죠. 

 

'마태복음(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10:1-4(21.10.08.금)  (0) 2021.10.08
마9:32-38(21.10.07.목)  (0) 2021.10.07
마9:18-25(21.10.05.화)  (0) 2021.10.05
마9:14-17(21.10.01.금)  (0) 2021.10.01
마9:9-13(21.09.30.목)  (0) 2021.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