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10:1-4(21.10.08.금)

은혜바라기 2021. 10. 8. 09:03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너무 자주 나오죠. 숫자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인간이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즉, ‘숫자가 복음을 설명하는데 좋겠다’고 판단하신 하나님의 허락하심 때문에 인간이 숫자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12는 정확하게 선택받은 자들을 뜻합니다. 12는 땅의 숫자4와 하늘의 숫자3의 곱셈입니다. 즉, 이 땅에서 복음을 알아 듣게 되어서 하늘에 들어간 자의 모든 자를 뜻하죠.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제자, 계시록의 144000(12*12*1000)명 모두 같은 의미죠.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묶어버린 구절이 나오죠. 물론 이 말씀에 자연이 복종하여 인간의 수명이 맥시멈 120년 전후까지 살 수 있는 상태로 된 것도 중요할 수는 있지만 이것은 성경의 초점이 아닙니다. 120년을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 땅에서 12 즉, ‘선택받은 자의 삶을 잘(10) 살도록 해라’라는 명령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4각형으로 위로 3층으로 만든 천국의 모형이었죠. 이것도 4곱하기 3하여 12를 나타내죠.

 그런데 노아의 방주 전에는 '9백 00 세' 까지 굉장히 사람이 오랜 살았던 구절이 계속 나오죠. 이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1,000살은 완전수입니다. 즉, ‘사람은 이 땅에서 완전하게 살 수 없다.'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이 땅에서 사람의 힘으로 천국에 도달할 수 없다. ' 를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923, 912, 943,......라는 숫자(삶의 한계=나이)로 표현하신 것이죠.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모든 선택받은 자들을 부르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들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귀신쫓아냄, 병고침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우리를 복음으로 구원하신 것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이름을 쭉 나열하시고 맨 나중에 가룟 유다를 말씀하시면서 ‘곧 예수를 판 자라’고 끝을 맺죠. 이것은 ‘이 중 가룟유다만 나쁜 놈이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판 자들이라는 뜻이며, 이 중 가룟유다가 그 역할을 맡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이것을 이해시키려고 성경은 두 가지 중요한 에피소드를 포함시켰죠. 첫째. 수제자인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 예수님의 부인하고 저주한 사건입니다.  둘째. 구약에서 예수님의 모형으로 표현 된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하던 요셉의 10명의 형제들입니다. 이렇게 선택받은 자들로 셈플링된 12지파와 예수님의 수제자 조차 예수님을 죽이고 저주하죠. 가룟 유다만 나쁜놈이 아닙니다.   

 가룟유다는 바로 ‘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도륙한 자로 인정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지옥을 가는지, 천국을 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죠. 그러나 만약 저의 의견을 묻는다면 가룟유다는 천국에 갈 가능성이 51%입니다. 이 부분은 조금 어려운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이해가 잘 안가시는 분들은 그냥 넘겨버리셔도 됩니다. 복음에 근거하긴 했지만 저의 사견이 들어간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왜 꼭 사견이 들어간 해석을 하는가? 에 대한 이유는 이 사견적 해석 자체가 복음을 들여다 보는 좋은 도구가 될 것 같아서 입니다. 

 가룟유다의 역할은 매우 특이 합니다. 일단 예수님이 제자로 삼으셨죠. 그런데 그것이 취소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속성에 치명적인 오류가 생기죠. 또한 예수님이 가룟유다를 설명하는 말 중에 ‘이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 했다.’라고 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왜 태어났니?’의 뜻이라기 보다는 ‘태어나지 않았다면 태초에 선택받은 자의 삶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데 태어나서 매우 힘든 역할을 맡았다’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습니다. 

 정리해보죠. 선택받은 자들은 그 선택의 시점이 태초 전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역사에서 잠깐 살아가는 인생은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이 어떤 방식으로 나를 구원했는가를 알게 하기 위한 시간이죠.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알게 된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옛자아와 남은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그 삶 속에서 우리는 죽을 때 까지 예수님을 다시 못 박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삶을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설명할 인물이 필요했죠. 그 인물의 역할을 맡은 자가 바로 가룟유다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이렇게 제가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가룟유다가 100% 천국이다.’라는 방향성을 갖게 되면 그것 또한 이단입니다. 초점은 ‘우리는 구원에 관해 관여할 수 없다.’입니다. 

 더 잔인하게 말씀드리면, 오직 천국은 ‘예수님’ 홀로 가시는 것 입니다. 나머지 모든 인간은 복음을 알던, 모르던, 교회를 다니던, 안 다니던 다 필요없이 전부 지옥에 묶여서 그것에 떨어져야할 운명이죠. 

 구원에 관한한 우리쪽 방향에서의 결론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 달려있죠. 오직 그분의 긍휼함에 달려 있죠. 저보다 더 휼륭하게 복음을 해석하신 분들 조차 말년에 자신의 복음해석에 갖혀서 그 표지판에 묶여 사는 것을 많이 봅니다. 절대 어떤 것에도 묶이면 안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보여야 합니다. 예를 포함한 비유로 오늘 묵상의 결론을 맺죠. 

 참신앙이란 마치 ‘여러 렌즈가 달려 있는 망원경’과 같습니다. 렌즈를 더 많이 낄수록 망원경이 보여주는 목표점을 더 잘 볼 수 있죠. 그런데 그 목표점은 오직 예수님(복음)한 분 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한 신앙생활이 어느덧 예수님을 목표점이 아닌 렌즈로 바꾸어 버리죠. 그리고 그 목표점을 ‘잘살기’ ‘좋은 신앙생활’ ‘멋진 인격’ ‘휼륭한 목사’로 바꾸고 말죠. 

 휼륭하게 복음을 설명하는 설교자가 어느 부터인가 예수님과 복음을 렌즈화 시키고 ‘자신의 복음을 알아듣게 하는 것’이 목표로 바꿔지는 경우를 목격합니다. 이것은 죄된 인간의 습성입니다. 여기서 누구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바울조차 말년에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평가했죠. 이것은 겸손의 말이 아닙니다. 참으로 그는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할 정도였죠. 

 인간은 가장 완벽한 환경(에덴) 속에서 죄에 오염되지 않는 최상의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지옥 같은 인본주의 삶 속에서 전적타락의 상태로 태어나서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이 '나 대신' 오신 것(인자)입니다.

 

 천국에는 오직 예수님만 계십니다. 나머지는 전부 지옥이죠. 그럼 선택된 나는 어디있죠? 바로 예수님의 품 안에서 그 분의 지체로만 존재합니다. 시간적 역사가 아닌 의미적 역사로 보면 우리는 이미 '천국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 위에서 예수님 없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나를 보면서 "아~ 저런 방식으로 내가 천국에 와 있구나! " 라고 보고 있는 것이죠.  복음을 좀 더 잘 보려면 시간과 공간이 없는 방식의 해석에 조금은 익숙해져야합니다. 영적인 삶 속에서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방식이죠.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복음의 눈을 뜨신 분들은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 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마시고  오직 " 마음이 가난한 자"를 중심으로 전파해 주세요.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복음에 눈을 뜨고 이 글을 묵상하는 분들은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감당하기 어려운 박해를 받게 됩니다.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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