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인본주의의 속성이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 가장 큰 작용을 하죠. 그것과 귀신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지배하는 것의 속성은 매우 닮아 있어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통하여 복음을 자주 설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이 땅(역사,인생)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의 숫자 4와 복음(하늘)의 숫자 3을 더해서 7인 천국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그 7인 천국에 도달하지 못하고 6인 인본주의에 묶여서 삽니다. 이 인본주의 6이 하나님의 숫자 3(세개)을 흉내 내는 것이 바로 6이 세 개인 666이죠. 그래서 666은 완벽한 인본주의에 묶여 버린 것을 뜻합니다.
아무리 바로 옆에서 복음을 외쳐도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해만 할 뿐 결코 인본주의 시스템을 버리지 못한 자들의 세상을 666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아무리 복음을 외쳐도 ‘가족’이라는 말 한마디에 다시 인본주의에 묶여 버리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옆에 두고서 ‘누가 내 어머니냐?’하시며 어머니를 부인하셨죠.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릴 때 부모에게 순종하였다고 나오는데,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도록’의 본질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로 거듭나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방언’과 비슷한 개념이죠. 사도행전에 나온 방언 에피소드는 복음이 오직 천국에 속한 사람들만 알아 듣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등장한 도구일 뿐이라고 말씀드렸죠. 같은 이치로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되는 것’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또한 35절에 나오는 ‘병든자’ ‘약한자’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35절 중반에 나오는 ‘복음을 전파하시며’에 속한 설명의 재료일 뿐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설명을 유대인들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음에 눈을 뜨지 못한 자들의 성경 해석은 모두 왜곡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잘 들여다 보면 그들은 논리적으로 답을 만들어 내죠.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점이 매우 두려운 부분입니다. 인간은 성령께서 이끄셔서 복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누구나 예수님을 ‘귀신의 왕’으로 만들어 버리는 존재가 됩니다. 인본주의 종교는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면 그 분은 나를 ‘잘살게’ 인도하는 신(맘몬신)이 될 것이라고 믿게 하죠. 이건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의 뜻은 전도란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두루 다시시는 것임을 뜻합니다.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공동체에 사람을 채우려는 행위는 전부 다 인본주의적 행위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신 것 뿐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것이죠.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니 조금 더 들여다 보죠.
우리가 교회에 사람을 모으려는 것은 인간들이 ‘나’의 확장 즉, 내가 속한 공동체를 확장하여 나의 울타리는 강하게 하려는 죄의 본능같은 것이죠.(이게 왜 죄의 본능인가? 물으시면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죄인으로 타락하게 된 후 가장 첫 행위가 바로 울타리[나무잎, 나무뒤]로 나를 감추는 것입니다. 즉, 두려움을 세력와 장애물로 막는 것이죠. 여러분이 10평보다는 30평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죠. 더 좋은 울타리를 원하는 죄성의 발로입니다. )
또한 교회확장은 전도를 통해 ‘내 노력’을 증명하려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바로 누룩 혹은 외식이라고 하죠. 그런데 교회 현장에서 이런 모습을 보면서 본질을 파악하고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이 나오게 됩니다. 물론 매우 극소수입니다. 이런 자들을 거듭난 자라고 합니다. 천국은 이런 두 단계를 밟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절을 보죠.
마13:47-48 :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천국은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물에 물고기를 가득 모으고 이 후 다시 끌어 내어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고르는 두 단계를 거친다고 하시죠. 매우 두려운 말씀입니다.
솔로몬과 같이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바친다는 ‘개똥 같은 생각’을 하지 마세요. 이것은 나만의 하나님을 만들어서 내가 만든 ‘인공 구조물’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 ‘성전짓기’를 반대하셨죠. ‘하늘이 내 집이고 땅은 내 발등상인데 내가 이 성전 안에 있으랴?’고 하면서 솔로몬의 생각을 깨주려고 했죠. 그런데도 솔로몬은 끝끝내 인본주의에 갖혀서 ‘성전짓기’를 요구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허락하시죠. 그렇게 허락하신 이유는 ‘그것을 통해 복음을 설명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신 것이 그 이유일 뿐입니다. ( 나중에 예수님이 성전과 예수님의 관계를 나와 예수님의 관계로 설명하시는데 사용하셨죠. 결국 성전은 성경 곳곳에서 비유의 도구로만 사용된 것 뿐입니다. 정말 그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확정된 것이라면 지금도 이스라엘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시면 안됩니다. 우리를 불쌍하게 보시도록 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입니다. 마음이 가난한자, 애통한 자가 되야 합니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죠. 주님께 기도하세요.
‘추수할 것’은 당연히 선택받은 자들을 뜻하죠. 그리고 ‘일꾼이 적어서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고 하시죠. 여기서 '추수할 일꾼들'을 잘못 이해하면 ‘사명받은 사람들(목사, 선교사)’로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오직 추수하시는 분은 예수님(성령님)한 분 뿐입니다. 그리고 추수할 일꾼들은 그 분의 도구들을 뜻하죠. 이것은 사명받은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이 글을 쓴 제가 복음을 알아듣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딱 한 분의 목사 때문이 아니겠죠. 나를 태어나게 하신 부모님, 제 과거의 모든 환경, 그 환경 속에서 저를 복음으로 인도한 모든 시간, 사건, 인물 등등이 있었겠죠. 이 과정 중에서는 나를 때렸던 깡패들도 있을 것이고, 나를 배신한 친구도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이 세상의 모순을 깨닫는데 사용된 통로가 될 수 있죠. 여기서 이 통로들이 전부 다 '추수할 일꾼'입니다. 그래서 추수할 일꾼은 천사들이 될 수도, 깡패들이 될 수도, 목사들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그 기준이 '예수님이 사용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이죠. 이것을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나는 사명자이다.'라며 나를 기준으로 바꾸죠. 이것은 예수님의 공로에 숟가락을 얹어 보겠다는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