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오늘도 계속 같은 패턴의 안경을 쓰시고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선택받은 자들을 보내신 것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 복음의 안경을 쓰고 이 글을 읽으면 너무 가슴이 뭉클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태초에 선택하시고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셨는가를 설명하시기 위해 잠깐 우리를 역사 속 인생에 넣으셨죠.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이리 속에 양을 보내 놓은 것과 같이 안타깝다고 하시죠. 이 때의 양은 선택받은 자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복음의 안경을 쓰면 나와 예수님이 같은 몸이라는 사실을 늘 인지하셔야합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시죠. 4가지 단어를 한가지씩 풀어보죠. 제가 이 묵상을 쓰면서 항상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설명을 짧게 하면 읽으시는 분께 오해가 생기고 설명을 길게 하면 너무 장황하게 늘어지죠. 이 경계에서 항상 고민을 합니다. 그러니 읽으시는 분께서 늘 기도하시면서 묵상을 하셔야합니다.
뱀은 사탄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사탄이라는 존재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스템입니다. 그 이유는 흰색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검은색이 필요한 이치죠. 그래서 검은 색은 정확하게 흰색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지혜는 복음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능력을 말합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하나님께 선물로 받았죠. 솔로몬의 잠언과 전도서는 모두 인본주의의 삶 속에서 복음을 찾아내는 책입니다. 그래서 지혜서라고 하죠. 물론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는 이 잠언서 조차 인간이 살아가면서 교훈으로 삼기에 좋은 책이라고만 알고 있죠. 이렇게 복음의 눈을 뜬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큽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자가 제사 때 사용한 대표적 제물입니다. 즉, 죄를 없애 버리는 수단이죠. 그래서 ‘죄가 없는 상태’를 순결이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 이 '순결'을 찾아보면 ‘innocent(결백한)’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죄가 없는 상태가 어떤 상태일까요? 성경은 죄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나옵니다. 정리하면 순결한 상태는 예수님을 믿는 상태, 혹은 복음을 알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결국 ‘이 땅에서 인생을 살 동안 오직 예수님만 믿는 순결함을 가지고 복음을 정확하게 알아보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즉, 모든 역사는 복음이 스토리고 예수님이 주인공인 것을 알고 그 관점으로만 살아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은 정치무용론을 기준삼아야 합니다. 인본주의의 결정판이 정확하게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잘 살까?’를 고민하는 집단이죠.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죠. 즉, 최선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차선, 차차선의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을 우리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잠깐 살펴보죠. 묵상 속의 묵상입니다.
(( 구약에 보면 왕이 없던 시대에 사람들은 이방인들처럼 자기들도 ‘왕’을 달라고 하나님께 조릅니다. 왕과 정치를 통해 인간이 잘살게 되기를 바랬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계속 거절했습니다. 즉, ‘이것은 너희들에게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나 인간의 계속된 요구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꺽인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의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인간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왕과 정치’는 오히려 구원과 상관없이 인간을 더 힘들어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인간이 계속 요구하자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는 인간이 더 힘들어진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복음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왕과 정치를 요구한 것은 사람이 “난 사서 고생할꺼에요”라고 요구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신 것이죠. 즉, 인간은 조금 더 쉬운 구원의 역사를 포기하고 더 개고생을 해야 얻어지는 구원의 역사를 선택한 것이죠. ))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인본주의와 복음이 얽히면 박해가 벌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 우리가 복음을 세상(교회 안에서도)에 전할 때에 박해를 받지 않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 복음 안에 소량의 누룩을 섞어서 복음을 맛나게 먹을 수 있도록 개량해서 전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묵상에도 절대로 묶이면 안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목표로 볼 수 있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저의 묵상도 누룩이 무조건 섞여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 판으로써의 역할을 더 잘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그러나 정말로 복음을 완벽하게 전하면 그 누구도 박해받지 않고 전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인간을 전적타락한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밝혀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야만 오직 예수님을 100% 믿게 되죠. ‘아~~~ 이래서 예수님이 오실 수 밖에 없구나 ~ .’ 이렇게 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합입니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박해를 받게 되는데 이것을 통하여 증거가 되게 하려 한다고 하시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총독들과 임금들의 실체가 누구일까요? 바로 나의 옛자아입니다. 즉, 거듭난 나는 나의 옛자아에게 가장 큰 박해를 받게 됩니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진리의 싸움이 아마겟돈의 실체입니다. 선택받은 나와 그렇지못한자들과의 싸움과 박해는 사실 내 안의 싸움을 하나님께서 객관화 시켜서 내 안의 싸움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시스템이죠.
그래서 ‘증인의 삶을 살아라’는 말도 '전도를 열심히 해라'는 말이 아니라 복음의 눈으로 내 옛자아가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고 죄가 깊은지 스스로 증명하여 알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증명된(한) 자가 되어 천국에 올라 오라는 것이죠. 그래야 천국에서 다시 에덴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죠?
그런데 이렇게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절대 만만치 않죠? 평생을 내 옛자아가 거듭난 나와 딱 붙어서 나를 박해할 텐데 이것을 어떤 방법으로 이길까요? 그래서 다음 구절이 바로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하시죠. 즉, 오직 말씀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말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광야의 시험에서 정확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모든 시험을 이겨낸 장면들이 생각이 나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오늘 마지막 말씀에 나오는 ‘성려님’께서 이 모든 것을 견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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