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어제까지 같은 패턴의 묵상의 안경을 끼고 보았습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를 파견한 것은 하나님께 태초에 선택받은 자들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오늘 부터는 그 패턴에서 벗어나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셔야 합니다. 성경 전체가 바로 어제까지 보았던 패턴에 녹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신 이유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목적은 이 복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다른 말로 사랑이라고 하죠. 이 하나님의 사랑인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입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라는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교회를 다니고, 좋은 말씀을 읽고 휼륭한 인격을 가진 크리스챤이 되어서 행복한 가정을 누리는 것과 완벽하게 모순되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심지어 복음을 알게 된 나와 아직도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의 옛자아와 끝없는 아마겟돈 싸움을 벌이게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선택된 자들에 국한합니다. 즉, 말씀으로 인한 갈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을 말하죠. 하나님을 통하여서든, 자기 힘을 통하여서든, '잘먹고, 잘살기'만 바라는 자들은 말씀도, 이 묵상도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신 이유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무엇을 가르치시기 위해’ 만드신 본능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부모가 되면 자식을 위해 희생하게 되는 것 뿐이지, 우리가 휼륭해져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서 보면 이기적이고 밑바닥 인격의 소유자가 자식의 일이라면 두손 두발 다 걷어 붙이고 달라붙는 사람들을 종종 보죠. 반대로 인격이 휼륭하다고 평가를 받는 대학 교수가 자식에게는 너무 소홀한 경우도 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이 심어 준 이 ‘자식사랑’이라는 본능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람마다 식욕의 차이가 다르게 태어나는 것과 같죠. 이런 ‘자식사랑’은 식욕, 성욕, 수면욕과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부모가 자식을 매우 사랑하는 것과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성욕을 느끼는 것은 완벽하게 같은 가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어둔 이런 본능들은 어느 한가지만이라도 없었다면 인류는 이미 멸망합니다. 즉, 이 모든 본능이 전부 복음을 설명하는 최고의 가치를 가진 수단으로 창조된 거룩한 것들입니다. 자식사랑도 거룩하고, 성욕도 거룩하고, 식욕도 거룩합니다. 그런 것들을 복음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욕심에 가두어 버리면 타락한 해석으로 전락해버리죠.
이렇게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고 지속시켜서 그 안에서 복음을 설명하시고 그 복음을 알아듣는 자들을 찾아내어 다시 예수님의 신부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시죠. 이 계획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복음이 매우 잘 들리죠.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혹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정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늘 이런 방향의 안경을 쓰고 본 묵상을 따라 오셔야 합니다.
모든 동물은 태어나면서 대부분 짧은 시간 안에 스스로 기어서 어미의 젖을 빨죠. 그러나 인간만이 긴 시간동안 부모가 젖을 물리지 않으면 죽습니다. 또한 동물은 태어나서 얼마 안되 스스로 서서 걷습니다. 그런데 인간만이 매우 오랜 기간을 그렇지 못하죠. 하지만 인간이 유전적으로 가장 고등한 생물이죠. 왜 이런 모순이 생길까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만드셨을까요? 바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랫동안 받아야만 살아 갈 수 있다는 복음의 핵심을 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보살피지 않으면 바로 죽는다."를 말하고 계시는 것이죠.
자식이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의 속을 무척이나 썩히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반항하는 인간들을 설명합니다. 이런 자식을 보면서 복음의 눈을 뜬 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죠. 그런데 이런 자식을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하나님도 아셨죠. 그래서 그것을 미리 예고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비로 하와에게 내린 축복(저주)입니다. 즉, ‘잉태와 산통의 괴로움’이죠. 이것은 하나님이 여자에게 ‘너~ 죄졌으니 고통을 받아라~~ 10달동안~~’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미 이 수준을 벗어났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자에게 내린 이 축복은 바로 인간이 이 땅에서 애를 키우면서 받는 고통을 뜻합니다. 이것은 2개의 확장된 표지판의 역할을 합니다. 첫째, 여자가 애를 힘들게 낳는 것은 이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될 때 까지 즉, 성인이 될 때까지 정말 오랜 시간 부모의 속을 썩힐 것이라는 예고편입니다. 일종의 예방주사 같은 역활이죠. 그래서 여자들이 자식이 너무 미워도 배아퍼 난 것을 생각하면서 참는 경우가 많죠. 둘째. 그래서 태어난 자식은 정말 오랜 기간 동안 부모의 속을 다 파내고 속 썩이며 자라납니다. 이 부분이 본질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과 그것을 지켜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리키는 표지판이죠.
이렇게 가족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최고의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체제인 가족은 하나님께서 무너트리지 않고 항상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가족은 공산주의가 맞습니다. 돈은 부모가 버는데 쓰는 것은 다 같이 쓰죠. 그런데 그것을 부모는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이 모방하여 전체 사회에 적용시키려한 역사가 있죠. 바로 공산주의 사회입니다. 그런데 전부 다 망하거나 독제체제로 변질되죠. 절대 하나님의 섭리가 없는 공산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라는 것을 매우 오랜 시간 역사를 통해 인류에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민주주의는 옳바른가? 그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민주주의를 좋아하셔어 성공적인 나라들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완벽한 기독교 역사관을 심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은 “로마 > 프랑스,독일 > 영국 > 미국 > 아시아”로 2000천년 동안 움직였죠. 이렇게 지나온 나라마다 기독교가 전도 되었죠. 그런데 희안하게도 이 순서대로 경제가 발달하죠. 그래서 매우 부유한 나라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봐~~ 기독교가 들어가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어 나라들이 전부 다 잘살게 되잖아~~”로 기독교 역사관을 갖게 되죠. 그러나 이것은 완벽하게 잘못 해석한 기독교 역사관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되어 어떤 지역에 복음이 들어가서 그 지역이 복음의 진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차면 사탄은 이것을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자본 즉, 돈’이라는 것을 사용한 것입니다. 잘 사는 듯 보여도 복음을 외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가 발달할수록 계속 교회는 텅텅 비어가거나 변질이 되죠. 지금의 유럽교회를 보세요. 지금의 미국을 보세요. 평양 대 부흥 때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 교회를 비교해 보세요. 돈은 많아지고 복음은 사라진 텅빈 교회들, 술집으로 팔리는 교회들, 변질된 교회들의 자유민주주의 속의 기독교 역사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묵상의 꼬리를 잇다 보니 너무 멀리 갔네요. 다시 말씀으로 가죠. 가족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복음을 설명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아셨죠? 그래서 오늘 말씀에 ‘가족끼리 서로 죽일 것이다’라는 표현은 바로 ‘거듭난 나와 나의 옛자아’의 싸움을 뜻합니다. 자식은 또 다른 나의 분신이라고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죠. 맞습니다. 가족은 바로 "확장된 나"입니다. 다시한번 정리하면, 이 말씀의 진정한 실체는 바로 거듭난 나와 나의 옛자아의 싸움을 가리킵니다. 물론 복음 때문에 실제로 부모와 자식이 싸우고 갈리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내가 나의 내면의 상태를 다시 살피도록 만든 하나님의 배려인 것이죠.
이렇게 우리는 나의 옛자아에게 평생 끊임없는 박해를 받게 됩니다. 매우 큰 갈등이죠. 그러나 주님께서 이것을 넉넉하게 이겨내게 하실 것이고 결국 거듭난 나는 예수님의 신부로써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 넉넉하게 이겨낼 수 밖에 없냐면, 이 싸움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는 것(믿음)’이 전부죠.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된 소식이죠.
마지막으로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는 말씀은 나의 옛자아가 주는 박해를 내가 이겨볼 생각으로 이 동네 즉, 이 상황에서 '내가' 노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것과 ‘분리’ 즉, 피하는 것이 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곧 인자가 오리라’는 뜻으로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은 의미적 순서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정확한 뜻을 말씀드리면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나의 옛자아와 분리시키시고 인자 예수님의 품으로 품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어려운 부분이 많죠? 이 세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말씀하기 위해 만드신 제한된 공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즉 '나(인자)'로 오셔서 나 대신 천국에 갈 수 있는 모든 자격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예수님은 한 몸이다라는 것이 이해가 되셔야 합니다. 즉, 지금 이 땅에서 내 옆에 예수님이 계셔서 나를 잘살게 돕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품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우리는 그 분이 십자가를 지실때 같이 그 분과 같이 죽어서 그 분의 품에서 부활한 채 천국에 그 분의 지체로써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이 옛자아의 의미는 그냥 이 옛자아를 통해 "이정도로 내가 죄인이라서, 이정도로 내가 무능력해서, 이정도로 내가 무가치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품으실 밖에 없으셨겠구나~~"를 알려주는 일종의 "내가 나를 관찰하는 시간"일 뿐입니다.
또 한가지를 알아야 할 중요하 점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도 결국 '나' 즉, '나의 옛자아'입니다. 즉, 나의 옛자아의 확장이라는 것을 이해하셔야합니다. 그래서 '인류를 위해 최선을 다한 성인들' 이나 '이기적으로 자기만 위해 살아간 사람'이나 결국 인류를 '확장된 나'로 본다면 이 둘은 똑 같습니다. 즉, '나와 인류'가 같은 개념이라면, '나만 잘되면 되' 와 '인류가 잘되야 되'는 같은 개념이라는 것이죠. 한국에서 이순신장군이 휼륭한 사람이지만 일본에서는 완벽한 원수입니다. 같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갈리죠? 한국과 일본이라는 '나라'라는 개념에 '확장된 나'를 대입한 결과입니다. 이것을 온 인류에 대입하건, 나라에만 대입하건, 교회공동체만 대입하건, 가족에만 대입하건, 나 개인에만 대입하건 결국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담의 허리에 이미 모든 인류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이야기를 풀어 내는 것입니다. 복음에 눈을 뜨면 이런것들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됩니다. 정확하게는 성령께서 가르쳐주면서 '그냥' 이해가 되죠. 눈먼 자에게 장미꽃을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모자라지만 눈을 떠서 그냥 '보면 되면'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이 장미꽃이 무엇인지 아는 것 처럼 말이죠. 우리는 인본주의에서 벗어나 신본주의를 지향해야합니다. 즉,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품안에서 그 분의 눈(기준)을 통해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정확하게는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렇게 될 수 있게 만드시는 것이죠. )
이것이 바로 천국의 진정한 실체입니다 .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라고 말씀드렸죠? 즉, 진정한 천국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하는 말은 바로 " 성령께서 나를 예수님의 품에 넣으시고 예수님의 눈(기준)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는 것 " 이것이 바로 참 기독교가 가져야하는 천국의 개념입니다.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복음의 눈을 뜨신 분들은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 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마시고 오직 " 마음이 가난한 자"를 중심으로 전파해 주세요.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복음에 눈을 뜨고 이 글을 묵상하는 분들은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감당하기 어려운 박해를 받게 됩니다.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